Sweet Sorrow · 달콤한 슬픔
Sweet sorrow 서울역 거리는 달콤한 슬픔의 냄새가 난다. 나의 먼 옛날을 돌아보면 그러한 냄새의 기억이 있다. 실패를 경험한 후에 느끼는기분 혹은 손에 잡힐듯한 뜬구름을 기대하며 현실을 외면한 안락함 그들은 그걸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하루를 보내고 난뒤 찾아간 잠자리가 어제 머물럿던 그자리에 감춰둔 박스나 신문지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을 때의 안도감 그 달콤함에 그들의 슬픔은 한겹 쌓여간다. 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앞으로의 나의 미래를 들여다보며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목포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일찍돌아가시고 엄마는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재가를 한것 같다.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고 철들어 찾은 고향은 우리를 아는 이가 없었다. 내 기억에 6살인지 7살인지 고아원에 들어가서 국민학교를 들어간 그시절은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모른다. 학교를 간날보다 안간날이 더 많았고 점방에서 훔치던 기억이 많았다. 국민학교 3학년때 산수를 잘한다고 칭찬 받던 기억은 숫자에 대한 친근함은 성인이되어서 국민학교 졸업이 다인 내가 설계도면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개발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한 부분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려고 하면 꼭 해내고 마는 성격은 나의 파란 만장한 인생의 여정이 만든 인고의 세월 덕분이다. 고아원에 있으면 원장 선생님과 아주머니들이 심부름 시키고 잔소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아침 먹자마자 나왔다. 고아원에서는 나를 그냥 내버려둔다. 때로는 밖에서 자고 늦게 들어가도 상관을 안한다. 중학교를 들어가야하는데 공부하기가 싫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마음 속으로는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공부를 따라가기도 어렵고 학교 선생님들이 학교에 필요한 돈들을 안가져 온다고 때리고 앞에 나오라고 하여 고아원 출신인것을 아이들에게 알리기라도 하듯 망신을 주기 때문에 학교를 갈 마음이 없었다. 그런 선생님 한테 대들고 튀쳐 나온뒤로 학교를 가지 않는다. 그래도 국민학교 졸업장은 겨우 받았다. .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친구를 사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작고 외소 하기도 했지만 학교 에서 선생님이 야단을 치면 대드는 바람에 친구들의 경계 대상이었다. 고아 출신에 모난 성격을 가진 아이는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6학년 후반기에는 아예 학교를 가지 않고 목포 항구에 자주 나갔다. 아버지가 뱃일을 하던 사람 이었던지 항구가 익숙했고 그곳이 좋았다. 항구 주변을 다니면 가끔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배 주변에서 평상에 화투 자리를 펴서 쉬는 뱃일 하는 아저씨들 심부름도 해서 용돈을 벌기도 하였다. 가끔 목포 시내를 나가 심심하면 군것질을 하기도 하고 용돈이 생기면 짜장면을 사 먹고 시내 구경을 하러 나갔다. 그날도 구멍 가게 앞을 기웃 거리는데 순경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데리고 파출소로 갔다. 그러더니 집이 어디며 나이가 몇이냐 등을 물었다. 위협적인 태도의 순경의 태도가 무서웠다. 고아원에 산다고 했더니 구치소의 작은 방에 가두었다. 그곳에는 행색이 초라하고 술 먹고 약간 제정신이 아닌듯한 아저씨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 짚차를 태워 공터에 군용 버스가 서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우리를 군용버스 같은것에 태웠다. 아저씨 나 집에 간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면서 때리는 바람에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허름한 행색의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운동장이 있는 어느 건물에 다 달아서 우리는 모두 내렸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구분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7명이 들어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나보다 먼저 들어온 아이들이었으며 부랑 아 같이 보였다. 대부분 아이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 듯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매치기도 하고 구걸도 해서 두목에게 가져다주었다고 하면서 그 아이들은 이곳이 좋다고 했다. 날마다 두목에게 맞고 돈을 벌어서 숨길 경우는 손도 잘리는 무서운 곳이었고 도망 나오고 싶어도 서로 감시하여 빠져 나올 수도 없었다. 우리가 머무는 곳 그곳은 큰 공장 같았다. 아침에 밥을 먹고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앞에 원장이라는 사람이 정신 교육을 시키고 각자 담당한 일을 하러 공장으로 갔다. 그곳은 포장을 하는 곳이었다. 목 장갑을 10개 씩 묶어 포장을 하고 때로는 비누, 화장 지 등 다양한 것들을 포장했다. 나는 도망 갈 궁리를 하였다. 철통 같은 보안이 되어 나갈 수도 없었고 도망갔다 잡혀온 사람은 마구잡이로 패서 다시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떻게 하든 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화장실을 갔는데 푸새식 화장실 속에 턱이진 콘크리트를 발견 하였다. 일찍 저녁을 먹고 화장실을 간 척하고 나와 변기통 속에 내려가 턱이 진 곳에 발을 딛고 모서리 나무를 붙잡고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담을 타고 올라가 뛰어 넘었다. 지붕 같은 곳에 떨어졌는데 군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밤새 걸어 겨우 도착한 곳이 파주 어느 곳이었다. 그렇게 도망 나온 아이들이 가끔 있는 모양 이었다. 나를 발견한 사람이 신고를 하였고 다시 돌아와 죽도록 맞았다. 그러고도 두 번을 더 탈출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잡혀왔다. 그래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푸세 식 변소 통에 숨었다가 인적이 없어지면 도망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였다. 그럴 때 마다 행색이 거지나 다름없던 나를 경찰이 잡아서 수용소로 보냈다. 도망치다 잡히면 죽도록 맞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죽을 정도로 때려도 소용이 없는 꼴통인 나를 더 이상 건드리지는 않았다. 어느 날 무슨 일인지 차들이 많이 왔다 갔다하고 며칠이 지나서 나갈 사람은 나가도 된다고 하였다. 19살이 되어서야 그들은 나를 내보내주었다. 아마도 그곳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서 공장이 폐쇄가 된것 같았다. 그곳에 더 머무를 사람도 있었다. 더는 도시에서 돌아 다닐 수가 없었고 밤 기차를 몰래 타고 고향인 목포를 찾아갔다. 공장에서 포장일을 하고 준 얼마 안된 돈을 가지고 목포행 무궁화 호를 탔다. 반나절도 더 가는 기차를 지루 한 줄도 모르고 타고 갔다. 수용기관을 나와 바깥세상을 맞이하는 해방의 기쁨은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 내내 자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엄마의 행방을 찾아 도움을 청할 길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서 부터 실마리를 찾을 지를 몰랐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족 그렇게 떠돌다가 만난 사람들. 심부름을 하면 먹여주고 그나마 잠을 잘 곳이 생겼으며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다. 목포 삼거리 파 그들의 이름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패거리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 나의 깡다구있는 행동은 우두머리의 눈에 들어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람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우리 패거리는 목포를 접수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패거리를 힘으로든 회유를 하던 넘어서야하는 일이 생긴다. 나는 나름의 방법을 통해 우리 편이나 상대방을 기선제압을 해야했다. 방법 중 하나는 목숨을 담보하여 죽기 살기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죽기 살기로 덤비면 한 놈은 죽어 나갈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기선 제압을 할때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어느 날 항상 삼거리 파를 위협하는 놈들이 공격을 해온다는 첩보를 받았다. 대대적인 경찰의 소탕 작전에 말려 두목이 잡혀가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경찰을 피해 숨어 지내던 때였다. 우리 중 한 놈이 틈을 타고 우리를 배신한 사건이 생겼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부두 상권의 정보를 몰래 빼돌려 준 것이다. 두목이 서울로 압송 된 마당에 이런 일을 겪는 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배신한 놈을 죽이겠다고 각오를 하고 같이 다니는 동료에게 함께 치기로 합의를 했다. 그는 그놈들에게 당한 적이 있었고 복수를 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다. 너가 하면 나는 무조건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놈들이 우리를 치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회칼을 챙기고 어스름한 밤이 되어 그놈들이 모여 있는 집을 찾아갔다. 이미 패거리들이 우리의 공격을 알고 있었고 기다리던 놈들에게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기 살기로 도망을 쳤다. 배에 한방 그리고 머리에 칼을 맞았는데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동맥을 찔릴 뻔 했다. 지역을 옮겨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형사들에게 알려져서 어느 정도 치료를 하고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사건은 신문에 크게 날 정도로 큰 일이었고 깡패 들을 잡아 청산하는 분위기에 나는 폭력으로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았다. 두목의 사건이 정리되면서 풀려나게 되었고 나의 주민 번호가 바꿔치기 되면서 나의 전과 기록은 없어지게 되었다. . 내인생을 돌아보면 고아로 떠돌며 도와줄 사람없이 어렵게 헤쳐나온 세월이 기구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도소에서 나왔을때는 당장 먹고 자고 할 곳도 없었다. 교도소를 나오면서 사회생활 적응 기간동안 머무를 수 있는 교정 기관으로 갔다. 그곳은 낯설고 불친절하였으며 교도소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곳이었다. 자격지심에 모여있는 사람들끼리 싸움도 잦았고 어설프게 정 붙이면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눈에 보였다. 나는 사회로 돌아가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무는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 왜소한 나를 쉽게 보고 무시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는 차라리 나가는것이 더 안전 할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였다. 교도소에 경범죄로 들어온 노숙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천국인것처럼 떠들어댄다. 먹을것 있고 옷도 때가되면 배급을 주는데 종류도 다양하고 잘하면 좋은옷을 배급받는다고 그리고 돈도 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이 기억이 났다. 노숙인들의 정보로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은 밥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도 있다는 서울역을 가보았다. 당장 먹을 것을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어 배가 고픔을 참고 한가한 구석지 자리를 찾아 앉았다. 피곤해서인지 박스를 깔고 앉은 자리이지만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누군가 발로 차는것 같아 눈을 뜨니 몸집이큰 영락없는 거지가 서있었다, ‘누구허락 받고 여기있어 비켜’ 하는 발음도 부정확한 굉음이 들렸다. 놀라서 자리를 비켜주고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 200미터 쯤 가니 죽 줄이 서 있었다. 5시쯤 되었을까 무슨 줄이냐고 했더니 밥을 주는 급식소라고 하면서 줄을 서라고 하였다 천사의 미소를 띄며 배식을 하는 사람들을 지나니 식판에 돼지불고기, 김치, 콩나물무침, 미역국이 올라와 있었고 맛있게 먹고 있는 동안 옆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건다. 이곳이 처음인가? 그냥고개만 끄덕였다. 매일 식단이 바뀌고 배식하는 팀이 다르다는것이다. 내일은 음식이 다른게 나온다는 정보를 알게되면서 다른 정보도 알 수 있을거란 기대를 하면서 잘 알 수 있는 사람을 찾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밥을 먹고 서울역 주변을 돌아보았다. 텐트속에서 시위를 하는지 모여있는 사람들도 있고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를 하는 교회 사람들이 있다.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니 나에게 친절했던 교도관님이 생각이 났다. 항상 나에게 성경속의 인물들을 예를 들어가면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호자가 없는 나에게 영치금도 주었던 친한 교도관님이셨다.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옮겨 갔는데도 찾아와서 면회 와주던 분인데 출소 할때 준 용돈 5만원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 급한일이 아닌 다음에는 돈을 아껴둬야한다. 양말 속에 감추긴 했지만 신경이 쓰인다. 한쪽 구석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친해보이고 노숙을 한지 오래된 사람들인것 같다. 무슨 정보가 있는지 기웃거려본다. 대부분이 50대를 지나고 60대의 나이였다. 나처럼 어린 사람은 없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너 집나왔냐? 밥은 먹었어?” 라고 말한다. 밥을 먹었다고 하니 새우깡 몇개를 집어준다. 너 갈데 없으면 이따 나 따라와 여기서는 아무데서나 잘 수 없어 잘만한 곳은 다 자기 자리가 있어 라고 말한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말싸움이 붙었고 나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눈짓을 하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지하 벙커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 가려면 몇가지 검사를 해야되는데 오늘은 못가고 내일 그곳에 데려다 줄테니 검사하고 그곳에 들어가 노숙인 등록을 하면 병원 이용도 할 수 있어 오늘은 내 옆에서 박스깔고 신문지 덮으면 잘만하다.” 라고 했다. 아저씨 건물과 건물사이에 텐트처럼 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해 놓고 어디서 구했는지 1인용 침낭을 가지고 있었다. 보따리가 이것 저것 있는데 이곳에서 다 필요한것들인것 같았다. 작은 코펠을 이용해서 믹스커피도 타서 한잔 주었다. 그런 기구를 마련하고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는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것 같았다. 이름을 물었는데 가명을 말했다. 어차피 아무 이름이나 의미가 없을것 같기도 했다. 내 이름은 이 영식이 되었다. 아저씨의 이름은 김택수 이다. 건설업에 종사하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술만 먹고 살다가 부인과 이혼하고 서울역으로 왔다. 나만한 아들이 있다고 한다. 아마 아들 생각에 나에게 잘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이곳에 온지 3년이 넘었고 이곳을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양평에서 빌라를 짓는 일을 세명이 동업을 했는데 건물주를 소개한 동업자가 미리 돈을 다 받아서 튀었다는 것이다. 목수였던 친구는 술만 먹고 지내다가 자살을 했고 자신도 죽으려고 서울역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교회 목사님을 만나 교회에서 지내다가 답답해서 나왔다. 이곳도 웬만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세상 편하고 좋다고 하면서 옷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용돈 벌이도 할 수 있으며 간섭 받지 않고 살 수있는 자유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교도소에서 들은 이야기와 같았다. 이분은 이곳에 둥지를 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김씨 아저씨의 이야기로 새벽까지 노숙의 방법을 전수 받는 격이 되었고 고단 했던지 아저씨가 말하던 도중 잠이 들어 아침이 되니 눈이 떠졌다. 김씨 아저씨가 주는 두유 하나를 마셨다. 서울역 생활은 아저씨를 만나고 그곳의 사정을 조금씩 알아가니 막막했던 마음이 창문을 하나 달아놓은 느낌이 들었다. 신문지 하나를 덮어도 자도 잘 수 가 조금 더 있으면 추워지는데 그때는 신문지 하나로는 안될것 같아 당분간 서울역에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씨 아저씨가 말한대로 벙커 앞에 가서 대변 검사와 가래검사를 통해 벙커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검사가 끝나고 점심을 준다는 곳에 김씨 아저씨와 함께 갔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배식 센타인데 그곳에서는 삼계탕이 나왔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특식이나 선물들을 주기도 하니 부지런해야 노숙도 한다고 했다. 푸짐한 삼계탕 한그릇을 먹고 나니 커피도 한잔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호주머니에서 부스럭 거리며 믹스커피를 꺼내 나에게 건넨다. 뜨거운 물이든 컵을 건네며 담에 갚으라고 한다. 그냥 빈말로 하는 것 같지 같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사실 고마웠고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온 노숙인들의 까만 봉지가 궁금했다. 지켜 보고 있다가 종이컵 믹스커피 그리고 컵라면등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고 때에 따라 누가 주는 것들을 받기도 한다. 등에 맨 가방에는 두꺼운 옷 그리고 갈아 입을 옷 몇개와 두루마리 휴지, 비누등이 있다는것도 알게 되었다. 김씨 아저씨는 오후에 가는곳이 있는데 같이 갈것을 물어온다. 할일도 없는데 따라가겠다고 했다. 서부역 뒤쪽으로 돌아가는길에 몇군데 자신들이 모이는 아지트를 알려준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4.5년을 그곳에서 지낸 사람들이라는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집회에 가서 돈을 벌기도 하고 각종 단체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들이주는 선물과 현금등을 챙겨 오면서 살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실시하는 성경책 배껴쓰는 일을 필사라고 하는데 만원도 받는다고 했다. 오늘 김씨와 참석한곳은 인문학 강좌가 있는 곳이였다. 학교를 다녀 본적이 없었지만 항상 동경해 왔던 곳이 학교였다. 어느 대학에서 만든 강의로 유명한 강사들도 온다고 하니 궁금했고 인문학 강의는 나에게 학교에 대한 갈망을 해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강의에 등록을 하였고 6개월의 기간을 인문학에 빠져 있었다. 강의를 들으면 들을 수록 과거 나의 생활이 되돌릴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고 아쉬운 마음 뿐이었다. 환경이 좋았으면 지금처럼 살지 않았을것 같았고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머리가 나쁘지 않아 누구 못지 않게 공부도 잘 할 수 있었을거라는 마음도 들었다. 인문학 강의는 나에게 좋은 생각과 앞으로 바른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나에게 인문학 수료증은 대학교 학교졸업장과 같은 자부심을 갖게 만들었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벙커 안에서 착실하게 지내는 나를 잘봐주신 담당자 덕분에 3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처음 온 노숙인에게 벙커 생활 안내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배급해주는 역할이다. 나에게는 사회생활 하면서 벌어보는 정당한 댓가였고 이렇게 정직하게 돈도 벌 수 있구나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돈을 받을 때 마다 김씨 아저씨와 식사도 같이 하고 3만원씩 용돈을 드리곤 했다. 쓰지 않고 모은 돈이 300만원이 되었다. 서울역에 지내면서 가끔 갔었던 영등포역 근처는 서울역과는 약간 분위기가 달랐다. 서울역보다는 서민들이 많이 오가는곳이었고 무언가를 할 수 있을것 같은 희망이 있는 곳이었다. 영등포 근처에도 무료 급식소가 있다. 서울역에서 일을 마치고 오면 무료 급식이 끝나고 적은돈 들여 저녁겸 먹을 수 있는곳은 포장마차 우동 이었다. 그럴때마다 포장마차를 보면서 큰돈 안들이고 장사를 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포장마차 주변을 기웃거리며 알게 된 아주머니는 우동을 시키면 꼭 덤으로 닭똥집이라든가. 오뎅 하나라도 얹어주었다. 그러면서 손님이 많을때는 자리를 비켜주며 쓰레기라도 치워주면서 아주머니와 친해졌다. 그렇게 한 두달 지나면서 물건을 어디서 해오는지 어떤 안주를 만드는지 등을 어깨 너머로 배워갔다. 아주머니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지만 가족이 없고 혼자산다고 대충 둘러대니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하시며 부지런하다고 칭찬을 해주시니자주 그 포장마차에 가게되었고 새벽에 포장마차 정리하는것을 도와주게 되었다. 어느날 아주머니가 포장마차에 관심이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했다. 아주머니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 할 수 없이 하고 있었는데 힘이 들지만 접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포장마차를 열기에는 충분한 돈도 없었고 그곳 실정도 잘 몰랐다. 포장마차를 마련하는데 한두푼 드는것도 아니고 만일 시작해서 잘 안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도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내가 가진 돈에서 200만원을 보증금으로 주고 동업을 하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가끔 몸이 좋지 않다고 딸을 내보내기도 했다. 아주머니딸은 아주머니가 집에서 만들어주는 재료를 가져다주는일과 설겆이 하는 일을 돕는 정도였다. 어느날 아주머니가 할말이 있다고 하면서 포장마차를 하루 쉬자고 하는 것이었다. 포장마차를 열지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주머니 집으로 갔다. 아주머니는 여러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많이 먹으라고 하신다. 그동안 한번도 집으로 오라고 하지 않아서 마음에 걸렸다고 하면서 음식을 앞으로 밀어주면서 먹으라고 권하신다. 뜸을 들이더니 자기딸과 혼인을 하면 어떻겠나고 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그동안 지켜보니 부지런하고 영리해서 딸을 굶기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나를 좋게 생각해준것이 고마웠고 안정적인 가정을 갖고 싶은것도 사실이었다.. 여자를 사궈본것도 아니어서 여자를 잘 몰랐다. 아주머니의 딸은 말이 없고 수더분하였다 순종적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족이라는 것을 몰랐고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서 가정이라는것을 가지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결혼식도 없이 아주머니집에 들어가 살았고 혼인 신고도 없이 결혼생활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고 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아주머니에게 고마웠다. 아내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냥 그런 사람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집안일을 알아서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포장마차일을 하고 늦게 돌아와도 아내는 나를 챙겨주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장모님은 나에게 포장마차를 물려주셨다. 포장마차일도 은근히 일이 많았고 바쁘게 지내면서 아내와는 크게 부딛칠 일이 없었다. 포장마차는 그런대로 잘 되었다. 손님이 있으며 새벽까지도 문을 열고 억척스럽게 장사를 하였다. 그런곳에는 자릿세를 요구하는 깡패들이 있었고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일뿐만 아니고 구청 직원들의 단속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 사이 아들이 태어 났다. 아내는 아들을 키우는 일조차 어려워해서 장모님의 손을 빌렸다. 점점 알게된 사실은 아내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고 딸을 나에게 시집 보내고 포장마차를 물려준 이유였다. 아내는 일상생활에서 정리가 안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장모가 중간에 도움을 주면서 큰 문제는 없었고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가정을 꾸리는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는 사이 둘째가 태어 났다. 둘째는 발육이 느린건지 돌이 되어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어다니기만 했다. 돌이 지나도 잘 걷지를 못했고 어딘가 모르게 다른 또래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노력을 해도 재정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도는 포장마차 일은 힘들었고 아내가 건강하지 못하니 아이가 문제가 있는것 같은 의심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은 현실로 되었고 아이는 정신지체장애가 있는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그동안 고마웠던 장모도 나를 속여서 딸을 시집 보냈다는 원망이 생기기도 했다. 포장마차가 끝나고 치우면서 남긴 술들을 먹고 취해서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잦았다. 집에 돌아와도 쉴곳이 없었고 아이들 둘을 잘 챙기지 못하는 아내가 보기가 싫었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것이 불만스러웠다. 같은 동네의 이웃인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가끔 포장마차를 따라오기도 하고 끝나면 같이 술 한잔 하기도 한 친구였다. 이름은 이 동구이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고 일찍 결혼하여 맘이 안 맞아 이혼하고 본가에 와서 어머니와 같이 사는 친구였다.
구청의 단속은 더욱 심해졌고 자리 세를 받으러 다니는 불량배들과 언성을 높이는 사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돈도 주고 달래기도 해봤는데 그들의 횡포가 심해지니 나도 강하게 대응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구와 같이 포장마차를 나갔는데 자리 세를 받으러 온 건달들과 시비가 붙었다. 경찰서에 가게 되었는데 경고 조치만 받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나는 주민등록이 말소가 된 상태였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다시 시작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다. 깡패들과 엮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부터는 의기 소침 해졌고 동구에게 포장마차를 그만 두고 싶다고 말을 하였다. 동구는 어디서 들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돈을 빨리 벌고 싶었고 아내와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다른 일을 시작하려면 말소된 주민등록증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아내와의 혼인 신고 그리고 두 아들의 출생 신고도 해야 했다. 동사무소를 찾아가서 새로 주민등록을 만들었다. 새롭게 만든 주민등록증은 나를 가족이 있는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 하게 만들어 주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나니 더욱더 깡패들과 엮이지 않는 직업을 찾고 싶어졌다.
나는 동구에게 포장마차를 물려주고 사우디로 가는 길을 물색했다. 동구도 포장마차를 나를 따라 다녀 일을 좀 알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터라 포장마차를 싸게 넘겨 주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는 면접에서 교도소에서 들은 건설 업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둔갑하였고 1년이 이 지난 후 에 사우디 아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비자가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
그동안 동구에게 포장마차를 넘겨주면서 챙겨야 할일도 있었고 장모님이 포장마차에 필요한 재료를 만들어 주는 것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은 약간의 흥분된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보리라는 희망으로 가득찼다.
그곳 생활은 이전의 나의 생활을 모두 잊게 해주는 신세계였다. 교도소에 있었을때 건설회사 사장에게 들은 건설 업계의 일을 내가 경험 한 것처럼 말을 했고 주먹구구로 알게 된 설계도면 읽는 법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갔다.
나는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잘 살고 싶은 욕심에 성실하게 살고 싶었다. 나는 어려웠던 지난 세월탓에 눈치가 빨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나지 않았다. 그리고 특별히 건설 담당 팀장의 눈에 들도록 노력했다. 왜냐하면 교도소에서 익힌 설계도 읽는 법을 팀장에게 보여주려면 자연스럽게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그럴 기회를 가졌고 팀장은 나의 학력을 아는 지라 그런 능력을 더욱 높게 평가 하는듯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와 있는 동안에는 나는 목포에서 고아로 자랐던 꼬마가 아니고 경찰에 붙잡혀서 수용소에 갇혀 도망 나온 경험을 가진 청소년이 아니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외국에 돈을 벌려고 온 그곳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일을 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과거의 나는 모두 잊어 버린 것 같았다. 팀장님은 한국에서 사람이 오거나 가족들이 오는 경우는 나를 특별히 초대해 주기도 하면서 공부를 좀 더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 안타깝게 생각을 할 정도였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서 살아가는 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를 새롭게 변화 시켜준 곳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생활이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세상을 새롭게 맞이하는 마음은 희망이 있었고 모두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일을 할때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은 시간을 엄수하고 성실하게 일을 수행하는것이라고 생각하여 누구에게나 인정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인정을 받으려면 다른 팀보다 빨리 일을 마치도록 아이디어를 내서 동료들의 사기를 높여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 태도는 팀장님의 시야에 들어와 나를 팀의 리더로 세워주셨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생활은 나를 자신감과 능력을 인정받는 곳이었다. 나를 인정해주는 팀장님 이었지만 나의 과거를 다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 고아로 자라 국민학교만 졸업 했다는것과 혼자 살아보려고 서울에 상경하여 일용직이나 건설현장을 따라 다니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자녀도 둘이 있는 가장으로 아는 정도였다. 일하는것을 보니 눈치도 빠르고 일머리가 있어서 부모 잘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면 공부도 많이 하고 지금과 다른 생활을 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것이다. 나는 항상 공허한 외로움이 있었다. 기구한 나의 인생에 대한 서러움이나 누구를 향한것인지 모르는 원망과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혹시 교도소에 같이 있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면 어쩌나하는 불안감도 항상 있었으나 이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나를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모든것을 다 이야기 하지 않고 지낸다는것은 일부러 속인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생활은 새로운 도전이었고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항상 긴장을 하면서 노력하는 일이 힘이 들었다. 교도소와는 달랐지만 외부와 자유롭게 소통 되지 않은 답답한 느낌은 수용소와 교도소를 연상하게 하기도 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덥고 건조하고 특별한 변화가 없는 날씨는 감정의 기복이 있는 나에게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약간의 우울 감을 가져왔다. 그나마 선선해지고 있던 겨울 날씨가 나를 잠재우고 있었다. 추위랄 것도 없는 쌀쌀힌 날이 되면 겨울옷을 꺼내 입기도 하는데 쌀쌀함을 즐기는 정도였다.
한국의 호되게 추운 겨울 날씨를 떠올리면 고아원에서 배고파 밤에 도망 나온 그 밤으로 나를 데려간다. 아는 곳 이라 고는 어렴풋이 생각나던 아버지를 기다렸던 부둣가 깜깜한 밤에도 어딘가 에는 불빛이 있었다. 그 앞을 어정거리다 불빛이 보이던 곳에서 나온 아저씨 눈에 들어와 그곳으로 불려 들어갔다. 뱃사람들이 새벽에 나갈 배를 타려고 모여 화투를 하고 있다. “ 너 집 없어? 추운데 한밤중에 여기있어? 밥은 먹었냐? “ 연거퍼 물어오는 소리에 겁에 질린 듯 가만히 있는 나에게 먹다 남은 빵을 준다. 받아먹고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아저씨는 그곳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셨는지 아침에 국밥을 말아 주셨다. “ 너 갈 데 없구나 잘됐다 여기서 잔 심부름하면 밥은 먹여주고 재워줄께 하신다.” 나는 대답 대신 연탄 난로 옆에 내어 놓은 연탄재를 밖으로 내어 놓았다. 추운 겨울에 얇은 옷을 입고 있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이 안 입는 옷이라며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사막의 겨울은 그 추웠던 부두의 추위 만큼은 아니지만 체온에 느껴지는 쌀쌀함은 나에게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했다. 건설 팀장 님이 한국으로 발령을 받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그동안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었던 건 팀장 님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이었다. 팀장 님이 한국에 돌아가신다는 소식은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듯했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팀장 님은 나를 불러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더 있을 지를 물어보고는 한국에 돌아가서 만나게 되면 같이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너무나 반가운 소리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이 답답하기도 했는데 나도 이제 한국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돌아온다는 생각은 비자 문제로 잠시 들어온 때와는 달랐다. 그 전과 많이 달라진 내가 다시 시작하는 모습과 좀 더 나아진 우리 집 형편을 상상하며 새로운 출발을 해야지 하는 각오도 해보았다. 최고예요 한국에 돌아온 기쁨은 잠깐 이었다. 큰 아들은 나를 닮아 왜소하였고 조용했지만. 둘째는 덩치가 컸다. 둘째 아들은 소통이 되지 않았고 행동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비자 문제로 한국을 잠시 나왔다 들어 갔을때는 짧은 기간 이어서 집에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문제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사우디에서 만났던 지인도 만나고 비자문제도 해결하려고 다니다 늦게 집에 돌아가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느낄 수 없었던 문제들이 드러났다. 포장마차를 하는 동구는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날 수도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낸 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보다 장모님을 더 믿었고 관리를 잘 해주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모님은 무릎이 아파 병원을 다니다. 어쩔수 없이 수술을 했고 전세금도 올려주어 해서 남은 돈이 얼마되지 않았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아를 가면서 동구에게 물려준 포장마차는 한동안 장사도 잘되고 했는데 구청에서 끌어가는 바람에 다시 장비를 사는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빌려 주었다는데 동구는 아직돈을 갚지 않고 있었고 바쁘다는 핑게로 만날 수가 없어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동구는 내가 없는 동안 집에 어려운일이 있으면 잘 살펴주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장모는 그런 동구에게 빌려준 돈에 대해서 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을 빌려주었다고 하면서 얼마인지를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포장마차 재료를 준비해주는 댓가로 장모와의 사이에는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거래가 소소하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 뉴스에서는 외국에가서 노동일로 벌어온 돈으로 아내가 춤바람 나서 돈을 다 탕진한 뉴스며 다른 남자를 만나 집을 나갔다는 뉴스가 가끔 나왔고 해외노동자들의 애환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사우디에서 벌어온 돈으로 집을 샀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도 얼마간 있을거라는 기대는 무너졌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뜨거운 날씨에서 고생한 세월이 허무했다. 장애를 가진 아들과 보내는 시간은 힘들었다. 더군다나 소통이 잘 되지 않은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을 오해하고 트집을 잡아 성격이 불같은 나와 아내와의 싸움은 그치지를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날마다 숨막히는 시간들이었다. 더군다나 가끔 동구에게 포장마차 재료를 가져다 주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재료를 가져다 주면 얼마간의 돈을 받는다고 하지만 나를 피하는것 같은 동구가 아내와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의심도 해보는 힘든 세월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것 같았다. 포장마차를 다시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나를 피하는듯한 동구를 한번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랫만에 나간 영등포는 약간은 낮설기도 했지만 눈에 익은 풍경들이 하나둘씩 시야를 자극하며 고향에 온듯한 느낌을 주었다. 동구는 나를 보더니 약간은 당황한듯 하면서도 반가워 했다. 내가 돌아 온것을 알면서도 동구네 본가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포장마차 일이 쉽지 않아서 나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 놓았다. 손님들이 들어오니 대화를 끊고 주문을 받아 부산스럽게 준비를 한다. 동구와 대화가 지속되지 않은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구가 내게 소주와 닭발을 내어 놓고 금방 우동 한그릇도 밀어 놓는다. 손님이 제법 들어와서 앉아 있기가 멋쩍어질 쯤 누가 불쑥 들어왔다. ‘동구오빠’ 하면서 아내가 포장마차에 들어왔다. 나와 마주친 아내는 놀라며 포장마차 재료가 든 보따리를 내려 놓고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다가 나보고 같이 안갈꺼면 먼저 집에 들어 간다고 하고 나간다. 나는 아내를 따라나와 동구를 오빠라고 부르는 아내를 붙잡고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사우디 아라비아에 갈때만 해도 두사람이 사이가 가까웠던 사이가 아니었다는 기억이 나는 순간 동구가 나를 피하는 듯한 느낌이 의심에서 확신으로 다가왔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하려고 했지만 숨길 수 없는 표정이 드러났던지 동구도 긴장을 하는 눈치였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술 한병을 다비우고 앞에 놓인 안주와 우동을 젓가락으로 휘젓기만 하고 있었다. 술 한병에 취한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도 손님이 끊이지가 않았다. 나는 그길로 간다 소리도 없이 포장마차를 나와 한참을 걸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텔레비젼에서 나온 뉴스가 나의 이야기로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멍해지면서 가슴으로 바람이 횡하니 지나가는듯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아내가 포장마차에 나갔다 온 사이 아이들이 늦게 까지 자지 않고 소란 스러운것이 짜증이 났다. 재료비를 얼마나 챙겨주는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나몰라라 하는것 같아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걸 께속 하게 한 장모에게도 화가 났다. 장모는 건넌방에서 내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방문을 열어보고는 곧 닫는다. 돈문제로 불편한 마음을 내 비친지가 얼마되지 않아 장모도 맘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아내에게 동구와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었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아내가 집안 청소며 아이들 단속을 안하는것을 핑게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내는 내가 지른 소리에 우는 아이를 울지 말라고 때렸다. 장모가 와서 말리고 나는 폭발하여 동구와 무슨사이인지 다그치고 소리쳤다. 장모는 무슨소리를 하느냐고 말리는 장모에게 딸이 모자라니 만만한 나에게 딸을 떠넘겼다고 소리질렀다. 아내는 아내대로 울며 내가 뭘 잘못했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며 남편이 없는 사이 바람이나 피우고 해외에서 번돈을 딴놈에게 준게 뭘 잘했다고 소리지르느냐고 하면서 말리는 장모를 밀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갈곳이 없었다. 생각나는 곳은 고향인 목포 부둣가가 생각났다. 마음이 심란할때는 항상 생각이 나던 곳,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때의 바람 냄새가 생각나는곳, 그리움같은 달콤하면서도 슬픈 기억이 있는곳 그곳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왜 한번 가려고 생각을 안했을까 하면서도 고향은 좋은 기억보다는 불행했던 기억이 많았고 누군가를 만날 기대와 누군가를 만날 불안감이 있던 곳이라 갈 엄두를 내지 못한 곳이었다걸 이해했다. 몇시간을 잤는지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목포에 도착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앉자마자 다른곳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고 머리에 겉옷을 뒤집어쓰고 잠들어서 옆에 누가 앉은지도 몰랐다. 눈을 뜨니 옆자석에는 연세가 드신 아주머니가 앉아계신다. 목포로가는 기차안은 소란스럽고 시끄러웠다. 입석을 타고가는 사람들은 통로에 서있기도 하고 바닥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그 틈에도 기관차 안내원이 교통정리를 해가면서 간식거리를 들고 통로를 비집고 지나간다. 간다. 생각해보니 저녁을 안먹었다는 생각에 안내원을 불러 계란 두봉지와 사이다2개를 샀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드리니 뭐 이런걸 주냐고 미안해서 어쩌냐고 하신다. 어머니가 이 아주머니 나이쯤 되셨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쳐다 봤다. “아닙니다. 같이 드시죠” 아주머니는 나에게 사탕 몇개를 주신다. 아주머니는 서울 분이신데 목포로 시집간 딸네 집에 가신다고 했다. 나도 출장 간다고 했다. 무슨 맘인지 목포를 모르는 서울 분이 라는 것에 마음이 편안했다. 목포에 도착하니 새벽이었다. 갈곳이 정해지지 않아 망설이다 역앞 택시정류장을 가니 택시 몇대가 서있다. 부둣가 이름을 머리에 되뇌이며 택시를 탔다. 선창 부둣가를 가주세요. 이른 아침에 선창부둣가를 가는것은 흔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간첩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 분위기를 봐서는 의심을 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택시 운전수가 묻지도 않았는데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하면서 이곳도 많이 변했네요 했다. 운전수는 ‘네 오랫만에 오셨으면 변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라도는 발전이 없어요 먹고 살것이 없어 사람들이 다 외지로 나갑니다” 라고 한다. 가는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낮설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낮설기도 하겠지 하면서 저절로 한숨이 쉬어진다. “아침식사됩니다” 라고 적힌 작은 백반집이 눈에 띈다. 고아원에서 튀쳐나와 무작정 왔던 부둣가 선술집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듯 지나가면서 오래전 나에게 따뜻하게 잘해주셨던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아주머니는 신혼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고향이던 목포로 내려왔다. 시댁에서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하면서 모질게 내쫒았는데 남편의 당숙인 주인아저씨가 화투방이었던 구멍가게에 국밥집을 열어 장사를 하게 했었다고 한다. 10여년을 국밥집을 하면서 아들과 살았는데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전에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계셨다. 아주머니 아들과 나이가 비슷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고 아들보다 몸집이 작은나에게 아들이 입었던 옷을 주시기도 하엿다. 아주머니는 내가 오고 1년이 지난뒤에 아들하고 같이 친정이 있는 경기도 수원으로 가고 국밥집은 화투방으로 변해 나도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먹고자며 잔심부름하고 용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뭐 드릴까요 메뉴판 보시고 주문하세요”라고식당 주인 아주머니 말에 과거의 기억에서깨어났다. “아무거나 시켜도 빨리 나옵니다” 라고 한다. 콩나물 라면 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콩나물라면에는 계란이 들어 있었고 계란 후라이도 따로 주었다. “감사합니다. 전라도는 인심이 후하군요” 하니 “다들 가족 같은 분들이라 하나라도 더 챙겨드려요 이곳에서 5년을 장사했어요. 목포가 싫어서 서울 공장에 갔는데 살기 힘드니 생각난곳이 고향이데요. 아버지가 이곳에서 작은배 선장을 하셨는데 배타고 나가셔서 안돌아오시고 어머니는 재가 하셨는데 새아버지가 엄마를 구박하는게 보기 싫어 서울로 도망갔어요” 그러면서 “해장술 한잔 드릴까요? 어제 손님이 남긴건데 돈 안받아요” 한다. “오늘은 새벽에 배타고 다 나가서 한동안 한가해요” 하면서 잔 두개를 가져와 앞에 앉아 따라주고 따로 둔 반찬을 가져와 자기도 한잔 한다. “ 여행오셨어요”” 네” “여기는 특별히 볼것도 없는데요. 바닷길을 따라가면 풍경은 볼만한데 다른건 없어요.“ 하면서 혹시 숙소가 필요하면 전화 주라고 하면서 직접 운영하는 민박집 전화번호를 준다. 바닷길을 따라 걸으면서 마음을 추스려 보려고 했지만 쉽사리 정리가 되지를 않았다. 자신이 처량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를 모르겠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문득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한국에 돌아 올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공중전화에 가서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목수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재주도 있고 성격도 좋은 친구였는데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가다시피 갔던 친구였다, 전화를 하니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다짜고짜 어디에 있냐고 했다. 팀장님이 너를 찾아 전화를 몇번이고 하셨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혹시 연락이 닿으면 전화를 달라고 했단다. 팀장님이 건설회사를 세우고 같이 일을 하려고 나를 찾으신것 같았다. 제주도에 일을 맡았는데 서울에서 하던 일이 마무리가 안되서 그러니 자기와 연락을 자주 하면서 제주도에서 일을 도우라고 했다. 사실상 현장소장님도 계시지만 현장감독을 하라고 하신다. 나에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팀장님은 나를 일처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나를 인정하신것 같았다. 팀장님은 이제 대표님이 되셨다. 언제쯤 제주도를 갈 수 있냐고 하시며 갈 수 있으면 오늘이라도 제주도 현장에 가서 현장 소장을 만나고 서울에 있는 목수 몇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냐고 하셨다. 그동안 나를 찾고 계셧고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것 같았다.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다. 여객선은 차도 싣고 가는 큰 배였는데 새벽에 출발하여 5시간 정도 걸렸다. 배 멀미가 나서 객실 안에 누워 잠만 잤다. 처음 가본 제주도는 대한민국 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같은 대한민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열대나무들의 풍경들이 다른 나라 같았다. 나는 머리가 맑아지고 답답했던 가슴이 탁트이며 해방감을 느꼈다. 대표님은 나를 반갑게 맞았고 그곳 현장 소장님을 소개해 주면서 목수와 일할 기술자 몇을 데려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에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으로 소개 받는 느낌이 들어 흐믓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소장님은 이미 자기 사람들이 짜여져 있는 마당에 불편 할 수도 있겠다 생각 했지만 대표님은 공사기간을 단축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계신것 같았다. 나는 하룻밤을 건축 현장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자고 뒷날 대표님과 함께 서울로 왔다. 난동을 부리고 집을 나가 며칠만에 목포에서 돌아왔는데 집안 사람들은 아무일도 없었던것 처럼 나를 대했다. 아내가 밥상을 차려 내왔다. 보통은 장모가 집안일을 돌보고 같이 밥도 먹고 했는데 장모는 부엌에서 왔다갔다만 하지 내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제주도에 갈 준비를 하면서도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동구와의 일도 거론하지 않았다. 대화로 통하지 않을것 같았고 아내의 불륜을 증명할 길도 없었다. 제주도에 할일이 생겨 그곳에 집중하느라 다른것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내는 아이들도 잘 돌보는것 같지 않았고 장모가 아이들을 돌보는것 같았지만 모른척 했다. 아내는 큰아들을 낳고 거칠고 충동적인 이상 행동에 의심을 했고 장애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장모가 장애가 있는 딸을 나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생각한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장모가 하는 행동 모두가 썩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돌봐줄 사람으로 의지 하였기에 큰문제를 만들거나 외면 할 수 없었다. 가족들과는 제주도를 간다는 상의 없이 옷가지 몇개를 챙기고 집을 나왔다. 대화를 시작하면 마무리가 될것 같지도 않았고 같이 제주도로 갈 사람들을 알아보면서 사우디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의 통화 내용으로 내가 제주도 가는것을 알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주도 현장에서 느끼는 기분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불러 데리고 간 목수 두명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 들을 데리고 용병을 모집해서 가는 느낌으로 잘해볼 각오를 하였고 우리의 분위기는 좋았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칠었다. 나와 같이 간 사람들도 다루기가 만만치 않았다. 공사기간에 맞출려면 기술자들에게 잘해야 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기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기세등등하여 배짱을 부린다. 기술자가 안나오면 그만큼 일정이 늦어지니 일단 공사가 시작이 되면 기술자들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것은 사실이다. 대표님도 그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불러들인것 같았다. 건설현장은 자칫 잘못하면 손해가 날일이 많다. 공정의 기일이 늦어지면 일당의 잡부는 물론이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인건비가 늘어나기 때문에 건축비가 늘어난다. 이럴경우 건축주와 건축 회사간의 분쟁이 생기게된다. 건축주는 처음 설계도를 잘 확인 하고 변경되지 않도록해야한다. 변경사항이 발생할 경우도 건축비가 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장 소장님은 깐깐하고 일도 잘 처리 하시는것 같았다. 내가 대표님과 직접 전화하고 자주 연락하는것을 현장 소장님이 못마땅하게 생각 하는것은 알았지만 나로서는 대표님에게 현장 상황을 보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표님이 제주도를 오셨다 가시면 소장님은 나를 더 경계 하고 별 다른 일이 없는데도 잔소리를 하였다. 건설 현장에서는 종종 자재를 빼돌려서 다른 현장에 팔아먹는 일이 있다. 소장님 입장에서는 소장님을 의심하여 사람을 붙여둔다고 생각해서 불쾌 할것도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눈치밥 먹고 자란 나는 그런일은 남들보다 빠르게 알 수 있었다. 그 일뿐만 아니라 소장님이 데려온 기술자들과 내가 데려온 기술자들간의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돌았다. 그래서 날자를 겹치지 않게 배정하기도 하지만 일에서 일어나는 책임문제를 서로 전가할때 중재역할을 해야한다. 인력들을 관리하고 현장의 자재들을 관리하는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었다 그럴때는 동료들과 술을 밤새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때로는 제주도 해안을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현장에 임할 수 있었다. 제주의 바닷가는 목포 앞바다로 이어져 물길을 따라가면 그곳에 닿을것만 같았고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것 같은 마음이 있었다. 누나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엄두가 안나는 일이었다. 이산가족을 찾는 일이 한창이던 때에도 어느것 하나 단서가 없는 나의 과거를 들고 이산 가족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나의 상황을 비관하면서 이산가족 찾는 현장을 밤새고 들여다보고 눈물 흘리며 가슴이 먹먹한 때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식도 버리고 갔을텐데 나도 지금 형편이 좋지 않고 좋은꼴 보여주지 못하는데 찾으면 뭐하나 생각 했었다. 제주도의 날씨는 비가 오면 육지보다 더 어두운 색을 드리운다. 제주도 특유의 현무암의 돌색이 무채색의 풍경을 연출하고 저녁이되어 어둑어둑 해지면 제주도의 짙은 어둠은 온몸을 꼼짝 못하게 감싸 안는다. 폭풍을 동반한 비바람은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나에게 주어진 자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찟어지는듯 아팠고 나와같은 길을 걷게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정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는 생사도 모르는 누나 엄마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 하기도 했다. 그런날은 몸이 가라 앉는듯하고 온몸이 아파와 밤새 실갱이를 하면서 결국 진통제를 먹고서야 잠이 든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겪고 나면 오히려 머리속이 맑아지면서 모든것을 잊고 새로운 시간을 살게 하는 힘이 생긴다. 제주도의 많은 건설 현장은 여기저기 많았고 활발했다. 서너달이면 건물이 번쩍 번쩍 들어섰고 우리 건축 현장도 바쁘게 돌아갔다. 지금의 대표님은 자신이 없는 현장을 대표님 지시에 따라 잘 관리해주고 있는 나에게 월급 이외의 돈을 챙겨 주기도 하셨다. 월급은 생활비만 보내고 남은 돈은 모두 저금을 했다. 아이들이 살 집도 마련 해야하고 공부도 시켜 나처럼 살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아내와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잘 하고 싶었다. 생활은 어느정도 안정이 되어갔지만 아내와의 사이는 남남처럼 되어갔다. 장모는 나에대한 감정이 나빠서인지는 모르지만 몸도 아프고 더이상 아이들을 못 봐준다고 했지만 아내는 아이들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아서 못들은척했다. 제주도에서 잠깐 집에 돌아왔을때도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장모님이 해주는 포장마차 재료들을 가지고 동구에게 갔다오는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동구를 만나러 포장 마차를 갔다. 아내와 동구 사이가 보통 사이 같지 않고 동구가 나를 피하는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동구는 깜짝 놀라며 그게 아니라고 한다. 나를 떳떳하게 보지 못하는 이유는 나 없는 사이 고생해서 번 돈을 빌려와서 갚지 못하고 있어서 미안해서라고 변명을 늘어 놓았지만 나는 더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고 들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아내가 더 이상 포장마차 재료를 가져올 수 없다는것을 이야기하고 친구로서 끝이라는 선언을 하고 돌아왔다. 아내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고 날마다 싸움을 하기에 지쳤다. 아내는 동구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나를 보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등 험악해졌다. 왜소한 나를 밀치고 때리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더 이상 제어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장모님은 아내를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자고 하였다. 오래전 부터 아내는 장모님과 정신과에 다니면서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 일을 나한테는 숨기고 있었고 장모님도 감당이 안되었던지 병원에 입원하기를 권하였던 것이다. 난폭해진 아내를 감당 할 수 없어서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장모는 서둘러서 아내를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장모는 그동안 나에게 섭섭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며 장모는 친정 동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데 딸인 아내를 돌봐야하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전세집이지만 돈을 보탰기 때문에 얼마간의 돈을 요구했다. 나는 그동안의 장모와의 정을 생각해서 제주도에서 번돈의 일부를 주며 나는 아이들 둘을 맡아 기르기로 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관계는 청산되었다.
장모는 나에게 섭섭했는지 그 뒤로 나를 보지 않았고 아이들도 보러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정부에 맡기고 돈으로 기를 수 밖에 없었다. 가정을 모르고 살았고 부모의 정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하는지도 몰랐고 가정을 어떻게 이루고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가정부를 구하고 가정부에게 의지하여 아이들을 양육했다. 아이들은 가정부와 함께 살았고 한달에 한번씩 집에 들어와 아이들이 필요한것을 채워주고 다시 나가곤 했다. 내가 올때 마다 가정부가둘째 아이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 했다.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하면서 월급을 올려주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둘째 아이가 몸집이 커지고 집에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년여의 제주도 생활은 아이들때문에 청산하고 올라와야했다. 건설 현장 생활은 의욕적이고 자신있었다. 공사판의 생리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일을 준 사람을 실망 시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는지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하면 모두 잘 따라주었다. 혼자 사는 일이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만 잘 자라준다면 별 걱정은 없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돌보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야 했다. 구청을 찾아갔다. 혼자 사는 사람인데 자녀가 둘이고 먹고살기위해 일을 나가야하는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먼저 장애인 판정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의사의 소견서를 가져와야한다고 했다. 소아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MRI 검사와 뇌파검사, 지능검사등 여러가지 검사가 끝나고 의사선생님이 열흘뒤에 오라고 했다. 장애인 판정은 소아과에서 하는것이 아니고 재활의학과에서 판정을 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특별히 무슨 병인지 말을 안해주니 답답했지만 그냥 올 수 밖에 없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오지만 아이들을 보는것은 어려웠다. 아주머니가 왜 못보겠다고 불평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지난일이지만 장모도 힘에 부쳤겠다 생각이 들었다. 딸이 온전치 못하니 손주들을 봐줄수 밖에 없었지만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힘들었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새삼스럽게 장모와 아내의 어려움을 몰랐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미련하여 본인이 경험 해야만 알 수 있다는것을 깨닫게 되는것 같다. 열흘이 지나고 재활의학과에서 뇌병변장애로 지적장애인2급 판정을 받았다. 장애인 등급을 가지고 구청을 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어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구청 직원은 그곳은 중증 장애인이 가는곳이라 해당이 안될거라고 했다. 나는 이곳에서 물러나면 카톨릭 시설에 못넣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2급이 중증장애가 아니면 누가 중증장애냐고 거칠게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드러 누웠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그곳의 좀 높은 사람이 와서 진정하고 저쪽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이 상황을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도 카톨릭 시설쪽에서 구청의 사정을 받아들여 자리를 만들어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저것 정리가 되고 한숨을 돌리니 먹고 살일이 걱정되었다. 비빌 언덕이라고는 건설회사 대표님밖에 없어서 전화를 드렸더니 서울에 공사 현장이생겨 그곳에서 일을 도우라고 말씀 하셨다. 나이가 먹는다는것은 공사판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나이가 어느정도 있어야 인력을 끌어가는데 힘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현장관리로 현장에 배치된 인력을 관리하였다. 인력 관리는 중요한 업무였다. 현장은 위험으로 가득했고 한눈팔면 사고가 났다. 인력에 투입된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인력으로 처음 나온 잡부들이 많았고 전문인력도 있었다. 잡부들은 하루 일당을 보고 오기때문에 눈을 피해 하루동안 슬렁슬렁 일을 할 수도 있다.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며 격려하는일도 그리고 애초에 꾀를 부리는 사람을 제외하는 것도 현장관리 몫이었다. 현장인력관리는 눈치빠르게 진행되어야한다. 일당만 바라고 오는 사람들은 안전에도 소홀하다. 큰 사고로 이어지면 공사현장에서는 산재보험이나 손해 배상문제로 복잡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도 잘 무마하는 사람이 현장 감독이 되어야 공사를 안전하게 끝낼 수 있고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다. 현장 감독은 때로는 공사 일정도 앞당겨 공기를 마칠수 있도록 해서 손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일처리 능력이 공사판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돈도 중요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것이 더 중요했다.. 우리가 맡은 구역은 야리끼리라고 하여 공기 날짜에 맞춰 일을 하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하게 돈을 챙겨주게되니 나의 신임도가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건설 현장에 인력을 제공해주는 회사의 사장님은 여자였다. 하얀색 밴츠를 타고 다녔다. 사장님은 인력팀들에게 친절하게 해주고 새벽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아침 밥으로 김밥이나 빵을 챙겨주었고 따뜻한 커피도 제공하였다. 그리고 인건비를 제때에 지불해주어 그 회사에는 인력이 줄을 섰다. 건설회사 사장이 나에 대해 칭찬을 하는것을 눈여겨보고 좋게 받아들인것 같았다. 작고 왜소했지만 일을 잘해내는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셨고 그리고 특별히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그 여사장님 인력회사에서 오는 사람들을 관리하었고 인력사장님이 일을 수훨하게 하도록 사람들을 관리하여 주었다. 가까이서 일을 돕다보니 인력사무소는 힘쓸일이 없고 머리를 잘쓰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만 가지고도 인력을 꾸릴수 있을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내가 인력 사무소에 관심이 있다는것을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사업 제안을 하였다. 인력 사무소가 몇군데 있는데 공사판이 커져서 여기저기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곳 현장을 접어야하는데 그동안 지켜보니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잘 다루는것 같으니 이곳을 맡아보겠냐고 했다. 인력회사를 할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당분간 자금을 대주겠다고 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였다. 인력회사 여 사장님의 도움으로 회사를 만들었고 인력회사를 시작하였다. 기존에 하고 있었던 공사장이라 땅 짚고 헤엄치기로 회사를 꾸려갔다. 참 알 수 없는것이 사람의 인생이었다.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것을 하늘에 감사할 뿐이었다. 인력회사는 돈이 되었다. 1년 정도 되니 여사장님의 도움 없이도 꾸려갈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돈을 많이 가져오지 않더라도 인력에 오는 사람들에게 후하게 하니 인력사무소가 사람이 줄을 섰다. 나는 인력 사무소에 만족 하지 않았다. 건설 현장에서의 인력 사무소는 건축주나 건설회사 대표님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건설업자들에게 인력을 잘 공급해주고 신임을 얻게 되면서 건설회사 사장님이 자기 회사의 하청을 맡아 해보겠냐는 제안을 했다. 바쁜 일정으로 다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했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앞세워 건설업 사업자를 내고 교각을 만드는 하청업을 맡아 하면서 돈은 벌게 되었다. 젊었을때 조직에서 배운 인맥 관리를 하는 방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모으고 관리를 하였다. 돈의 홍수를 맞은 것처럼 돈이 쌓여갔다. 호주머니에 고액 수표가 그득하였고 현금을 수백씩 가지고 다니면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관리하며 룸싸롱을 돌아 다니며 세월을 보냈다. 일부러 현금을 주머니에 많이 넣고 다니기도 했다. 약간의 허세를 부리면서 돈이 있는척을 했다. 정확한 날짜에 돈을 지불하였고 아침을 푸짐하게 챙겨주었다. 인력 사무실의 사람들은 정이 많아 작은 호의도 크게 받아들이며 감사했다. 그로인해 신용이 쌓여가면서 인맥으로 인한 인력 관리가 잘되었다. 때로는 술을 먹고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일을 나올때까지 기다려주고 돈이 없다고 하면 미리 돈을 주면서 그사람을 기다려서 일을 하기도 하였으니 그 바닥에서는 의리가 있는 인력관리 사무소로 유명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좌중을 사로 잡을 수 있는지 알았고 그걸 위해서 적당히 돈줄을 푸는 방법도 택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면 앵콜이 나올정도로 노래도 수준급이었다. 목청이 좋아서도 아니고 분위기를 잡는 멋을 부렸다. 그곳에 나와있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젊은 여자들이 돈 벌겠다고 나와 술 먹고 남자들의 눈치 살피는것이 안타까워서 맛있는것 사먹으라고 하면서 팁을 많이 주었다. 내가 가면 모두 내옆에 와서 서로 시중 들겠다고 할정도였다. 나는 그곳에서 나이가 어린 순이를 만났다. 순이는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고 갓 20살을 넘긴 나이에 아버지의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하여 갈곳 없이 방황하다가 다방을 거쳐 룸싸롱에 들어 왔다고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불우했던 순이에게 여인으로서보다 여동생이나 피붙이처럼 다정히 보살폈다. 건강을 걱정해주고 술도 덜 먹게 배려해주었다. 아버지 같은 나이의 나를 잘 따르며 곁에 있어 주었다. 돈을 잘 풀어서인지 아니면 살뜰히 보살펴서인지 순이는 나랑 살림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순이와 나의 동거가 시작이 되었다. 순이는 나를 첫사랑 처럼 좋아해 주었다. 나 또한 여인을 알지 못하고 결혼을 하여 아내와는 불행한 결혼 생활과 복잡한 관계속에서 남 녀의 정을 잘 알지 못했던 지라 순이와의 생활은 더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건축일 현장에서 나를 좋아하는 함바집 주방일을 하는 아주머니와 한집에 살고 있었다. 순이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를 떠나고 싶지 않아 문제를 만들지 않았던지 나의 사생활은 모르는척하고 묻지를 않았다. 함바집 여인은 한씨성을 가졌고 나와 동갑이었다.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소박을 맞았다고 한다.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하다는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후실을 들였는데 아들을 둘을 낳고 집안에서 후처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본처를 홀대하는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친정 식구들이 말리는데도 짐을 싸서 나왔다고 한다. 혼자서 식당일도 하고 남의집 식모살이도 하면서 함바집을 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하여 지금 건설 현장을 맡아 밥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아이를 못낳아서인지 아이가 아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내가 혼자서 아이들과 살고 있다고 불쌍히 여겼는지 일이 끝나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도 싸주고 아이들 옷도 챙겨주며 때로는 같이 술도 한잔 씩하면서 지냈다. 결혼 생활에서 전 아내는 나를 이해해주거나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가정 생활에 대한 상의도 없었다. 남편으로 존중해주는것도 없었다. 한시는 내가 걸어온 과거를 이야기 하면 참 대단하다는 듯이 맞장구쳐주었고 지금까지의 나의 행보에 존경심을 표했다. 한씨 아주머니의 그러한 행동은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은 한씨 집에서 지냈고 한씨는 나를 존경하고 극진히 모셨다. 정성을 다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갔다.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고 언제 어느 시간에 들어가도 극진한 대접을 하였으며 나를 남자로 존경받는 한 인간으로 대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의 행복이 없을 정도로 만족했다. 나는 건설업계 쪽에서 소문이 나면 날 수록 나의 인력 관리를 위한 공사가 끝난 후의 시간은 화려한 밤문화로 찌들어갔다. 나는 인력 관리를 한다는 명목 아래 함께 일하는 전문 인력들을 모아 술을 먹고 노래방을 가고 마지막에는 색시들을 불러 모텔에까지 들어가는 돈을 내주었고 돌아가는 택시비도 챙겨주었다. 그렇게 그들을 내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관리를 했다. 나는 밤에 그들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줄담배를 피우며 밤을 새고 컴퓨터 게임을 했다. 컴퓨터 게임은 집요한 나의 성격에 맞아떨어졌다. 사행성 게임으로 돈을 잃고 몸도 망가지는 날들이 쌓여갔다. 새벽이 되면 그들이 모이는곳에 아침 해장을 하고 공사장에 투입될 인원은 해당 공사장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행방을 알고 있어야 인력 공급에 실수가 없었다. 공사판에서 돈을 받으면 다음날 쉬는 몇몇은 화투를 하였다. 부둣가 화투방 심부름을 하다보니 눈썰미있는 나는 화투에도 소질이 있었다. 절대 뒤지지 않은 솜씨는 화투판에서 나의 유명세를 더하게 했고 이러한 일들은 공사판까지 이어져서 인력들을 이끌어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화투는 나의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여인을 알게 되었다. 진도가 고향인 그 여인은 남편이 뒷골목의 양아치 정도의 깡패였다. 남편은 돈도 벌어다 주지 못하면서 툭하면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고 때렸다고 한다. 남편은 결혼 전에 같은 동네 살았는데 엄마 아버지가 날마다 싸우고 동생들은 많아서 뒤치닥거리 하며 사는게 지겨워서 좋다고 따라다니는 얼굴 반반한 남편과 결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은 알콜 중독에다 돈을 벌어오지 않아 밖에 나가 일당 일이라도 하고 오면 의처증이 심해 폭행을 하여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딸이 10살 되던해 도망나와 서울살이가 시작이 되었다. 돈도 없는 타향살이 온갖고생을 하며 지내다 겨우 월세방 얻어 살고 있는데 동네 아는 언니가 딱하게 여겨 아이 데리고 일을 나가기 어려우니 화투방이나 열어 보라고 하였다. 동네 화투방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당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일이 없을때 모이는 화투방이었고 대부분 인력 사무소와 연결되는 소개소나 마찬가지였다. 화투방을 빌려주고 일정금액을 받았고 때로는 화투판에서 돈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음료수도 팔고 필요할 때는 술도 팔았다. 그 여인은 얼굴이 갸름하고 어렸을때 어렴풋이 생각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가끔 새벽에 화투판이 깨질때가 있으면 간단한 술상을 준비하여 소주를 한잔 하면 그 여인은 남편과 불행했던 과거이야기를 안주 삼아 시간 가는줄 몰랐고 이야기 끝은 눈물을 찍어내며 부르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런 불행한 과거를 가진 여인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나의 지난날 어두운 깡패시절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딸을 하나 데리고 도망나와 어렵게 살아가는 이야기는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였다. 그 여인에게는 화투방에 오면 딴돈을 다 내놓고 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노래를 곧잘 부르고 노래방 가는것을 좋아해서 쉬는 날에는 같이 노래방을 가기도 하였다 그여인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잔 기침을 하고 숨아 가쁘고 감기가 잦았다. 그러나 나의 방탕한 생활은 인력 사무소가 잘되면 잘 될 수록 화려하게 이어져갔다. 밀폐된 공간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사행성 게임으로 뜬눈을 세웠고 때로는 화투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중독된 삶은 건강을 해치면서 나를 죽음의 길로 인도 하였다. 감기가 심하게 걸리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동네 병원에 가서 감기약 처방을 받고 진통제로 안되면 주사를 놔 달라고 했다. 갈 수록 감기가 잦고 심해져서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면 숨이 가빠서 부르기가 힘이 들고 밀폐된 공간은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도 1년을 버티며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동네 병원에서 아무래도 증상이 심해지고숨소리가 고르지 않으니 큰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면 좋겠다고 했다. 감기가 걸리면 폐렴으로 곧장 이어졌다. 입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6개월간 반복되는 입원 생활은 사형선고와 같은 병명을 알려왔다. 폐가 망가져서 더이상 외부 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나는 모든일을 내려 놔야하는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풍운아처럼 살았던 지난 세월은 꿈처럼 사라졌다. 사업은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전과 같은 열정으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지금의 상황을 지속하다가 돈의 회전이 중단 되었을 때 벌어질 일은 감당하기가 어려울것 같았다. 건축 주에게 돈을 미리 받지 않아도 인력일꾼들에게는 먼저 돈을 지불했었던 것이 자칫 잘못하면 빚더미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빌려와 함께했던 사람에게 모두 넘기고 얼마간의 돈을 받았다. 내가 없이는 사업을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내 사정이 딱하니 어쩔 수 없이 인수를 하는것 같았다. 그래도 그동안 남은것은 책임을 져야할 두 아이와 나와 같이 지냈던 여인들이다. 그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고민해 본다. 일단 큰아이가 사는 전세집과 통장에 돈을 조금 마련해 주었다. 얼마되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살 수 있을거라 생각되었다. 작은 아들의 시설을 찾아가서 용돈을 조금 맡겨두었다. 시설은 돈이 들지 않은곳이지만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돈을 조금 남겼다. 순이를 만나러 갔다. 순이는 나이가 아직 30 후반이지만 결혼을 해도 될 나이었다. 새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순이가 가여워서 그녀의 운명을 알아보려고 귀신 점집을 찾았다. 점을 보던 사람은 순이에게 새로운 남자를 만나면 잘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굿을 해야한다고 했다. 산굿을 하기위해서는 천만원이 든다고 했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산굿을 하기위해 올라 가는 동안 순이는 내내 울었다. 나의 강요도 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차를 타고 산 중턱까지 갔지만 오솔길을 오르고 내리고 하는 동안 바라본 경치는 내가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풍경이었다. 고달픈 나의 운명을 내려 놓을 준비를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산 아래 전경은 죽음을 향해 타들어가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단풍이 들어 아름다웠다. 나는 순이와 드라이브를 자주갔었다. 좋다는곳은 다 가보았고 맛있는 곳이 있다고 하면 꼭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좋다고 하는곳을 다 다녀봤지만 오늘 바라보는 숲에서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는 편백 나무의 냄새는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고 순이의 새로운 삶을 축복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차에서 내려 숨가쁘게 애를 쓰며 오르는 오솔길에 순이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였다. 순이는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것을 아쉬워 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는 만나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했다. 산에 올라 굿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일이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며칠을 아파 힘들어 하다가 결국에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 자주 입원하게 되는 것이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엇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의 주변 정리를 해야한다고 생각을 했다. 경제 활동이 멈추고 나에게 남은 돈을 다쓰고 나면 오래 전 노숙인의 모습으로 돌아갈거라는 불안감도 있었고 병원비도 만만치 않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에게 남은 돈을 의미있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투방을 하는 여인은 나와 비슷한 운명을 가진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외롭고 쓸쓸한 그 여인의 삶을 위해 나의 마지막 남은 돈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것 같았다. 그 여인은 월세를 살고 있었고 화투방에서 벌은 돈으로 딸 아이와 겨우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씌였다. 그 여인을 만났다. 월세를 살고 있는 것을 항상 안쓰럽게 생각했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하고 싶다고 하면서 전세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화투방 주변에 집을 얻어주고 나의 상황을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곁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 여인은 울면서 내가 잘 돌볼수 있다고 언제까지나 잘 할 수 있다고 맹세까지 했다. 그러나 돈을 물 쓰듯하면서 기세당당하게 보냈던 나의 지난세월을 돌아보면 불쌍한 그 여인에게 빌붙어 살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다 하지 못한 지난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아파서 더 이상 남자로서의 역할도 외부 활동도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관계를 정리하고 헤어지자고 하니 울며 불며 매달렸다. 고아로 자란 나를 불쌍히 여기며 엄마처럼 헤어진 어릴적 누나처럼 다정한 그 여인을 두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점점 쇠약해지고 초라해진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새벽에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밖을 나왔다. 차를 타고 새벽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건설현장이었다. 내가 그동안 일했던 곳이 낮설었다. 아침이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같아 그곳을 바쁘게 빠져 나왔다. 그리고 함바집 한씨집에 도착하니 한씨는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고 한나절을 그곳에서 누워있었다. 피곤 했던지 잠이 들었다. 밥도 먿지 않고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저녁때야 한씨가 들어왔다. 한씨는 나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 했다. “아직 식사를 안했지요” 하면서 저녁을 챙겨 주었다 한씨의 따듯한 밥 한끼는 그동안 고민하며 힘들어 했던 일들을 잊게 하였다. 많이 야윈 나를 보고 걱정을 하면서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내일 함바집은 사람을 붙여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병원을 같이 가자고 했다. 오랫만에 꿀잠을 잤다. 내가 갈곳이 있고 한끼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곳이 있구나. 아직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병원을 찾아갔지만 당장 입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폐가 서서히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은 이미 나왔었고 평소에 건강에 유의하면서 지내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씨는 걱정을 하며 한숨을 쉰다. 바쁘다보니 같이 외식도 하지 못했던것을 생각해내고는 같이 밥을 먹기로했다. 평소 한씨가 가지 않는 음식집을 데려가 맛있는 밥을 사주고 싶었다. 양식은 입에 맞지 않다고 하여 가본곳 중에 제일 비싼 한정식집을 데려갔다. 코스요리로 나오는 한정식을 먹으면서 계속 감탄을 하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인생이란 참 별것도 아닌데 그동안 이런곳에 한번도 같이 오지 못한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이것이 마지막인가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내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것을 보고 “이런 음식을 좋아하는군요 그런데 맨날 해준 음식이 변변치 않았네요” 하며 수줍은듯 말헸다. 나는그런 한씨에게서 고마움을 느꼈다. 나에게 잘했었고 잘하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을 나는 기억하는데 그걸 미안하게 생각하는 한씨 였다. 한씨에게는 헤어지자느니 오지 않겠다느니 하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나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존중해주는 한씨마저 차단한다는것이 두렵기도 하였다. 내가 살집을 구하러 다녔다. 신월동의 작은 빌라의 이층 방하나를 얻어 놓고 가전기를 이것 저것 샀다. 작은 냉장고, 이부자리 1인용 침대 하나 감기 걸리면 안되기 때문에 작은 난로와 가습기를 샀다. 집을 나가기 싫을 때를 대비해서 컵라면과 햇반등도 준비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 기침을 해서 더이상 담배를 피울수 없는 몸이 되었고 술도 몸에 받지를 않았다. 신세가 너무 처량하였다.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일을 할 수 도 없었다. 내가 어렵게 되니 서울역에서 노숙하던 생각이 났다. 집에만 있는것이 답답하여 서울역을 나가보았다. 노숙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았고 훨신 더 많은 혜택이 것 같았다. 수염도 깎지 않고 허름한 옷을 입은 나의 외모를 보고 나를 동정하여 우유도 주고 빵을 주기도 한다. 그동안 풍운아처럼 살았던 시절은 꿈과 같이 물거품이 되고 나는 다시 교도소에서 나와 노숙을 하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동안의 애를 쓰며 살아왔던 시절은 물거품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나를 보면서 허탈함과 절망이 나를 공포로 몰아 넣었다. 건강을 잃어 다시는 노력을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인생을 더이상 지탱할 힘이 없었다. 신월동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방구석에 앉아있으니 그냥 죽는것이 나을것 같았다. 이 현실을 술을 마시고 잊고 싶었다. 컵라면 하나에 술을 1병을 마셨다. 눈물이 났다.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다. 나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울지 않았다. 눈물이 없는 세월을 살았었다. 맞닥뜨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지 하는 생각만 했었다. 어떤 어려움도 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나는 고아로 붙잡혀간 수용소 에서도 변소에 숨어있다 세번을 탈출한 사람이다. 깡패 생활에 어쩔수 없이 뛰어들었지만 행동 대장으로 다른 사람 위에서 조직을 끌어 왔다. 한다면 하는 의지로 내가 하는 일을 잘 해냈고 주변에서 나를 인정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안된다고 했을때도 무엇이든 해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상황을 뚫고 나갈 힘이 없다. 술이 취해 잠이 들었던지 주변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전에는 술을 몇병씩 먹고도 강철같은 정신력으로 잘 버티던 내가 술한병에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 벌써 밖이 환해서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밖을 내다보니 눈이 온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차를 몰고 올림픽 대로를 탔다. 이렇게 속도를 내대보면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게 나을것도 같았다.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무조건 달리다 보니 강원도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력을 할때 타일을 붙이던 동생이 있었다. 김정원이는 말 수가 적고 다른사람하고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정원이는 나와 함께 일할때도 일을 맡아놓고도 술을 마시고 며칠씩 잠수를 탔었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웬지 정이 가는 정원이에게 나는 그를 달래기도하고 기다려 주기도 했다. 때로는 돈이 없을때는 미리 돈을 주고 일 나올때까지 기다려 주기도 하였다. 그런일로 해서 정원이는 나를 큰형님 모시듯했고 다른 사람 말은 잘 안들어도 내뜻을 잘 받아 주었다.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일찍 가출하여 공사판을 따라 다니다 타일 붙이는 일을 배우고 전문 기술자가 될 즈음에는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건설 현장은 항상 술이 있었다. 고된일을 하고 한잔씩하는것은 건설 현장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공사판에서는 술로 일을 배운다는 말이 있다. 전문 기술자가 되면 그들만이 가지는 몽니가 있다. 어렵게 배운 일을 풀어내면서 가지는 그들만의 자존심이었다. 나는 그들의 자존심을 존중한다. 배운것 없이 건설 현장에서 고생해서 배운 일에 대한 가치를 그렇게 표현하는것은 그들만이 가지는 장인정신 같은 것이다. 정원이는 현장에서 술을 먹고 싸움끝에 사람을 다치게 했다. 항상 우려 했던 일이 생긴것이다. 정원이에게 신경이 싀였던 일이기도 했다. 항상 말 수가 없고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 언젠가는 일을 낼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었던것 같다. 안좋은 예감은 항상 맞아 떨어진다. 교도소를 다녀와서 잠수를 탔다. 정원이를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전에 강원도에서 작은 공사판에서 타일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연락을 했다. 같이 일을 다니는 여자를 만났는데 형님에게 소개하고 허락 하면 결혼 하고 싶다고 했었다. 내가 허락 안하면 결혼을 안하겠다는 말이 나에 대한 존중의 말로 느껴져 고맙게 생각했었다. 무조건 나선 길이었지만 그 동생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풀리는것 같았다. 고속도로는 눈이 녹아 있었다. 어디엔가 목적지가 있고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것에 위안이 되었다. 정원이에게 전화를 했다. 강원도로 너를 보러간다고 하니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날씨가 더 춥기전에 마무리해야하는 공사현장이 있어 형님이 오실때쯤에 마무리 할 수 있다고 도착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경포대 근처의 팬션 건설 현장이라고 하였다. 나는 경포대에 일찍 도착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해변도로를 드라이브하니 답답한 마음이 좀 가라 앉았다. 눈이 오다만 하늘을 보기도 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차속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오늘 생을 마감 한다 해도 미련이 없었다. 남겨진 자식들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가족에 대한 정을 모르고 살았고 자식에 대해서도 깊은정이 없어서인지 연연해 하지 않았다. 5시가 좀 넘으니 정원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 시간이 되었으니 식사부터 하자면서 경포대 근처의 잘아는 횟집의 주소를 주었다. 사귀는 여인과 함께 나타난 정원이는 서울에서 봤을때 보다 얼굴 표정이 좋았다. 정원이는 나를 그 여인에게 소개를 하면서 ”이 형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폐인이 되었을 거요 형님이 나에게 한것을 생각하면 은혜를 갚아야하는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찾아가서 뵈야하는데 . 이렇게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맛있게 잡수시고 저희집에 가서 주무시죠“ 했다. 나는 흐믓한 기분으로 잘차려진 상에 좋아하던 회를 맘껏 먹고 술도 한잔 했다. 집은 가까워서 걸어 가도 된다고 맘껏드시라고 한다. 그러나 정원이의 안사람 될 사람도 있고 해서 끝까지 소주 한잔을 놓고 저녁 식사를 마쳤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는 덕담을 하고 앞으로 이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달라고 하면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하였다. 같이 집으로 가자고 끄는 정원이를 잘 설득하고 헤어졌다. 정원이는 함께 가지 않는 나에게 아쉬움을 표하고 거듭 권유 했지만 한번 안하겠다고 하면 안하는 단호한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계속 권하지 않았다. 더 오래 있다가는 정원이에게 나의 현실을 들킬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어 타지에 홀로 남겨 놓는다는 부담을 덜어주고싶었고 딱히 그곳에서 밤을 보낼 이유도 없었다. 내일 일이 있다고 하면서 다시 신월동으로 돌아 가야한다고 했다. 눈이 내렸던 밤의 고속도로는 얼어 있어 위험 했지만 교통사고로 죽는 상상 까지 한 마당에 굳이 조심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새벽이되어 돌아온 신월동 집은 썰렁했다. 난방을 킬 생각도 못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이대로 죽고 싶었다. 내일 동사해서 죽은 시체가 되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서러웠다. 죽을 힘을 다해 살아왔던 지난날이 억울했다. 아침이 되어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전화기가 호주머니에서 꺼진채로 손에 잡혔다. 전화기를 충전을 하고 티비를 틀어 뉴스를 보았다. 어제 강원도 고속도로에서 5중 충돌 사고로 2사람이 죽고 3사람이 중상을 입은 사고 소식이었다. 생각보다 위험 했던 길 을 왔구나 생각하면서 나같은 사람이 죽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이 충전이 되어 켜 보니 여러군데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궁굼 했던지 전화로 안부를 물었고 정원이가 찾아와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와 다음에 오시면 집에서 꼭 모시고 싶다는 메세지 였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고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건설 현장은 당분간 정지되어 있을것 같았다. 전화를 확인 했지만 굳이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많이 아팠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기침이 좀 났다 찬바람을 쐬면 급성 폐렴까지 갈 수 있다고 감기를 조심 하라는 의사의 경고에도 강행한 강원도행은 폐렴 증상에 시동을 거는듯 했다. 일어나 갈곳은 특별히 없었지만 좁은 방에 앉아있기가 답답하여 집을 나섰다. 마지막 공사에 인력을 제공하고 현장 감독을 했던 곳에 저절로 발길이 닿았다. 새로 현장 감독을 맡은 아는 동생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공사가 얼마나 진행되어가는지 궁금해서 와봤다고 숨이 찾지만 윗층에 한번 올라가 보겠다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1층도 올라가기 전에 숨이 차서 겨우 2층을 올라가서 밖을 내려다 보았다. 겨우 2층을 올라오다니 하며 기를 쓰며 5층까지 올라갔다. 숨을 고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밖을 내다보며 뛰어내려 죽는 상상을 해본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거드름을 피우며 오고갔던 현장에서 죽을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했다. 겨우 내려와 현장 감독이 보이지 않아 그냥 차를 타고 말도 없이 나왔다. 이곳 저곳에 나의 손길이 닿았던 공사 현장이 눈에 띄였고 그럴때 마다 아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심장 한쪽이 아픈듯 아려왔다. 배가 헛헛함을 느끼는지 눈앞의 해장국집 간판이 크게 보였다. 해장국 한그릇이 나를 따듯하게 했다. 밥 한그릇의 힘이 느껴졌다. ,기력을 차리니 내가 우울증이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가까운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선생님이 묻는 몇마디 질문과 간호사가 주는 검사지를 하고 난후에 선생님이 우울즐이 왔다고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하면서 다음 진료 날짜를 정하신다. 간호사가 주는 약봉지를 들고 나왔다. 우울증이라니 몸도 아프고 이제는 정신도 멀쩡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더 기가 막혔다. 정신과에서 준 우울증약을 차에다 던져놓고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주를 3병을샀다. 소주와 같이 산 새우깡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술은 괴로운 현실을 잊게 만든다. 많은 사람과 어울려 수도 없이 마셨던 술이 이제는 1병을 마시면 취한다. 잊고 싶은것이 많아서인지 1병을 억지로 더 마셨다.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잠이 들어 깨보니 이틀이 지난 후였다. 몸이 허약하여 술을 이기지 못한것이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500ml 생수병을 단숨에 비웠다. 새벽이었다. 겨울 중반에 들어선 새벽 찬바람은 매섭고 마음을 더욱 외롭게 했다. 그러나 이 외롭고 쓸쓸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것 깨달았다. 나는 이미 내마음에 달콤하고 슬픈 방하나를 만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외롭고 슬프지만 나는 그걸 즐기고 있었고 그방을 나가기 싫어한다는것을 알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가 마음을 깨웠다. 두꺼운 잠바를 꺼내입고 옷깃을 입주변까지 올리고 집을 나섰다. 추위에 감기가 걸려 폐렴으로 될까 조심했다. 마스크를 쓰면 숨이 차서 할 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옷깃을 올리고 종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보았던 일상의 생활과는 다른 모습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리속에 섞여 들어가 뒷자리에 앉았다. 기침이 한번 터지면 제어가 안되는 상황이 올까 봐서 염려가 되어서였다. 찬송가가 흘러 나오고 시작되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소 했지만 내 몸을 휘감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눈물이 쏱아지는 이상한 경험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새벽기도회가 끝날때가지 흐느껴 울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도 모르는 그 새벽기도회는 나를 평안하게 했다. 새벽의 기도회는 술 담배로 찌들어 살면서 게임 중독과 도박 그리고 여자들로 둘러 쌓여 살아도 부끄러운줄 모르고 살았던 도덕 불감증의 내가 추악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홀홀 단신 내힘으로 살아온 길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 스러웠고 다른 사람에게도 멋지고 남자 다운 사람으로 비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렇게 보이도록 통크게 쓰고 인간적으로 보이도록 인정있게 했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가정을 돌보는것 보다 자신의 명예가 더 중요했고 스스로도 꽤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을 했었다. 깡패 생활을 하며 행동 대장을 했던 과거까지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다. 동시에 세여인을 두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생활했던것이 머리에 스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 아내도 없는데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 여인들에게 내 할 도리를 다 하고 정리 한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돌아보면 내놓을것도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온것이다. 이제서야 이런것들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것들을 자랑으로 삼았던 과거를 지울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나의 부족한 점을 돈으로 채우려고 했고 사랑 받지못하고 자란 나의 과거로 인해 가족을 사랑 할 줄 몰랐던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나의 과오들이 펼쳐지면서 눈앞에 스쳐갔다. 나의 자녀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못난 아버지 였고 헤어진 아내에게도 다정한 남편이 못되었던 것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것이 아닌가하는 하고 생각도 해봤다. 나의 잘못된 과거를 생각하면 죽는것은 차라리 쉬운 방법이다라고 생각했다. 나의 과오를 뉘우치기위해서는 과거의 잘못된 인생을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인생은 여기까지 이고 남은 인생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자라고 다짐을 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고 일찍 새롭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길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이러한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었다. 목사님을 찾아갔다. 새벽기도에 나온뒤로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것을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였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은 말씀이기때문에 성경을 알면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교회에 새신자반에 들어가서 성경공부를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셧고 그것을 믿기만 하면 나는 영생을 얻는다고 배웠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냥 믿기로 했다.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 자살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잘못된 과거 때문에 죽는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나의 인생은 이제 나의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의 과오를 뉘우치기위해서는 과거의 잘못된 인생을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구나 내 인생은 하나님의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야 되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피부에 닿지는 않았지만 새벽기도의 그 생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나의 인생은 여기까지 이고 남은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자라고 다짐을 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고 일찍 새롭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길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어떻게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 조직 생활을 할때부터 나를 희생하며 몸을 던져 헌신 할때만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은 교회에서도 같았다. 비겁하게 몸을 사리지 않으면 인정받는다는것은 어디에서나 통하는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도 그러한 생각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사람들을 인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도소를 나와 교정센타를 간 기억을 더듬었다. 그곳은 당장 갈곳이 없는 출소자가 어느 기간동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갈곳이 없어 찾아간 그곳에서는 교도소를 나와 재활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몇사람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가족이 있어도 이미 파탄이 나서 연락이 되지 않거나 사회에 있을때 가족들을 괴롭혀 가족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도소에서 아무리 새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어도 새삶을 시작하기에 붙잡을 끈이 없었다. 어느 누구하나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때로는 교도소에서 기술을 배워 나와도 낙인이 찍힌 과거가 발목을 잡기도 하고 그들이 속한 곳에서 안좋은 일이 생기면 제 1순위로 타겟이 되는것이 그들이기 때문에 버티기가 힘들다. 오히려 교도소가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또 저지르는 이유가 있다면 감옥 생활을 어느정도 알기때문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어렵고 어느때고 다가오는 달콤한 유혹은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다 희망이 없고 어려운 현실을 벗어 날 수 없을 때는 그런 결정이 오히려 맘이 편 할 수 있다. 달콤한 유혹과 슬픈 현실을 그들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출소 했을 당시 맞은 막막한 현실은 깊은 외로움과 약간의 강박증 증세가 생긴것 같다. 어떤 일을 하면 의미가 있을지를 찾아가는 길에 나는 자주 이런 상념에 빠졌다.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면 내가 오래전 교도소를 나와 오갈데가 없었을때 누군가 도움을 주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그때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돕는것이 내가 할 일인것 같았다. 딱히 무엇을 도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들이 나오면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도소를 나와 갈곳이 없었던 나처럼 아마 서울역은 그런 사람이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은 점점 더 쇠약해 지기 시작을 했다. 나는 날마다 일기를 쓰고 나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기를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나에게 앞으로 살아갈 일을 정리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없으니 국가 지원을 받을 길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것 같았다. 수급을 받으면 집세도 주고 생활비도 준다고 했던 일이 생각이 났다.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나는 건강이 많이 나빠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했다. 담당자가 나를 훓어보더니 마른 데다 수염이 덮수룩하고 행색이 초라해 보였던지 안으로 들어오면 절차를 설명해주겠다고 했다. 수급은 근로 능력이 없는 사람, 그래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부양가족까지 없으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6개월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병명으로 진료를 받은 내역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흡인성 폐렴과 폐가 70%이상 망가져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진단서 그리고 근로능력 증명서를 제출하면 수급을 받는다고 했다. 수급을 받는 일은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다. 병원을 찾아 서류를 떼고 동사무소를 갔다. 의료보험 공단에서 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러 실사를 나오고 LH 라는 곳에서 주거비용을 지급하기 위해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방문하여 월세 계약서를 확인 하면 계약서에 나온 금액에서 조정하여 주거비용이 나온다고 한다. 이 서류가 행정 처리 기간을 거치는 시간이 있어서 다음달 부터 지원이 될 비용이 3달 정도 지나야 지급이 된다고 한다. 통장은 압류 방지 통장으로 수급자들에게 돈을 입금해주는 통장이며 통장은 수급 통장으로 다시 만들어야 된다고 하였다. 나의 새로운 생활은 이렇게 수급 통장을 만들면서 시작이 되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서울역을 일주일에 두번씩 나가서 한바퀴씩 돌았다. 재활이 가능한 사람을 고르는 일을 한것이다. 천원짜리를 바꿔서 소주값도 줘보고 담배를 한두개피씩을 주면서 말을 걸어 보기도 했다. 몇몇 사람이 눈에 들어 왔다. 매주 이곳에 오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며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컵라면도 사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담배 몇개비 소주 한잔으로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다. 교회는 벌써 새신자 꼬리표를 떼고 구역 식구로서 집사님이라고 불리워졌다. 교회 나온지 1년이 넘어가면서 교회에서도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는 교회 식구로 인정 받았다. 구역장에게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말하니 정말 좋은 일이라고 교회에서 지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 보겠다고 한다 나에게 희망의 소리로 들렸다. 건강이 나빠지고 있고 1년 사이 병원 입원을 두차례나 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니 살 의욕이 생겼다. 3달이 지나자 수급 통장에 240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왔다. 집을 하나 얻었다. 100만원에 50만원 월세를 내는 집이었다. 서울역에 봐 두었던 사람 두명을 데리고 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지 않았다. 나의 생활이 그들에게 노출되는것이 싫은것도 있지만 리더의 역할을 하기위해서는 얼마간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좋고 흠이 잡히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들은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려고 했지만 그곳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고 어느 교회에서 돌보는 방에서 지냈다고 했다. 오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도 근무 했다고 하면서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술만 먹고 지내다가 형이 집을 팔아 버려서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씨는 직업군인으로 18년을 근무하고 집단으로 항명을 하다 불명예 제대를 한것 같다. 아뭏든 연금이 개시가 되는 20년을 코 앞에 두고 제대를 했다는것은 짐작 할 만하였다. 그들의 말은 100% 다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한 믿어줘야 했다. 두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군인이었던 정씨는 자신이 하는 행동은 다 맞고 다른 사람의 행동은 모두 못 마땅해 했다. 정씨는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 오씨가 밥을 해놓으면 먹고 설거지는 해줘야 하는데 정씨는 밥만 먹고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오씨는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돈이 생겨 술을 마시면 새색씨 같은 오씨의 주사가 말도 못했다. 그동안 쌓여던 것을 다 쏟아놓으며 밤새 중얼거린다고 한다. 물론 설거지를 안하는 정씨를 향한 원망과 잔소리는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건강하고 겉으로 보기에도 멀쩡한데 일을 하지 않는다. 일용직을 하더라도 한달에 어느 정도 돈을 모아 월세집을 마련하며 살 수 있을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뿌리가 없이 물위를 떠 돌아 다니는 부유 식물 같았다. 같이 모여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과거에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 같다. 일당을 25만원씩 받은 전문 목수 였다고도 하고 은행에 대부계에 근무하면서 청와대 근처 삼청각에서 비싼 한정식을 대접 받았고 돈을 물 쓰듯 써 본것 처럼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들의 수중에는 단돈 만원도 없었다. 나에게 매일 담배 몇가치를 받아가고 서울역이나 영등포 역을 나가고 싶다고 할때는 천원 이천원씩 용돈을 받아가면서도 큰소리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쉰다. 내가 저들이 어떻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저들은 다들 술먹고 다투다 경찰에 벌금을 물리고 벌금을 못내서 구치소에 들어갔다 나온 경험들이 있다. 차비를 받아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을 가는 것은 술을 얻어 먹기 위해서이다. 우리들의 규칙은 술을 먹으면 집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것 그거 하나이다. 집에 들어오면 라면과 교회에서 가져다 준 반찬에 밥만 해서 먹으면 된다. 그것도 게을러서 못하면 컵라면을 먹는다. 나는 여전히 일주일에 두번씩 서울역을 나간다. 오늘은 누구를 만날까하고 기대를 하며 나갔다. 천원짜리 지폐가 있고 담배 두갑이 들어 있다. 오늘도 서울역을 한바퀴 돌았다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담배를 권해본다.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담배를 받는다. 나처럼 왜소한 체격에 눈매가 고약해 보였다. 나를 보는 듯 했다. 해장국을 시켰는데 깜짝할 사이 먹는다. 김씨는 작은 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었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일감이 떨어지고 아내와 잦은 다툼끝에 이혼하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형제들이 많아 이곳 저곳을 다녔지만 오래 머물 수 있는곳이 없었고 홀어머니가 계셨는데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그곳은 갈 수 없고 하여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다. 김씨는 나를 따라 신월동에 들어 왔다. 세명이 한 집에 사는것은 약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를 속이고 셋이서 술을 먹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이 술을 먹은것 같아도 모른척 할때가 많았다. 문제를 들춰내면 그곳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노숙인은 출소자들과 사뭇 달랐다. 출소자들은 어느정도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안정적인 주변 환경이 주어지면 재범 확률이 낮아진다. 스트레스에 취약하여 충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진 문제점을 상담할 수 있고 풀어 나갈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면 재활이 충분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곳이 없다. 출소자가 노숙인이 되기도 하지만 노숙인으로 오래 있으면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노숙인으로 되기도 하지만 길거리 생활이 몸에 배기 전에 그들을 만나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3개월 정도 길거리 생활을 하면 돌아오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나 인문학 강의를 받지 않고 그냥 서울역에서 제공되는 밥과 간간히 주는 옷과 잠자리 제공 등에 익숙해지고 노숙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기 시작했으면 그것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 노숙인은 정신질환자로 분류가 된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게으르고 불결하며 사람마다 약간씩 다른 정신 질환 증세가 있었다. 신월동은 세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크게 어려움이 없는지 조용하다. 오늘은 같이 외식을 하면서 그들이 지내는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다. 신월동 공동체 집앞에 가까워지니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들어가보니 술판이 벌어져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집안에서는 술을 먹지 못하게 했는데 나중에 온 김씨가 술한병을 사서 가지고 들어와 먹다보니 오씨가 숨겨놓은 술이 있어 술판이 크게 벌어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 술이 깨면 들어 오라고 했다. 안그러면 이곳을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힘이 없고 왜소한 나였지만 단호한 나의 언행에 그들이 함부로 하지 못했고 말을 따랐다. 3,4시간쯤 지나니 한명씩 차례로 들어왔다. 나는 모두를 모아놓고 나의 파란만장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단번에 없어지진 않겠지만 이일을 봉사로 생각하고 함께 해나가자고 했다. 서로 의견을 물어보니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찾아보고 데리고 오면 좋겠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회의 아닝ㄴ 회의가 끝나고 짜장면을 같이 시켜서 먹고 다시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서 우리 공동체의 규칙을 확실히 해 두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술을 먹으면 안된다고 술을 먹고 싶으면 밖에서 먹는건 말릴수 없지만 되도록 먹지말고 만일 술을 먹게 되면 술이 깨서 들어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도 우리의 단합을 위해서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함께 살겠다고 했다. 나는 일주일에 두번 나가는 서울역 방문을 공동체 식구들도 집에서 답답하게 있느니 함께 서울역을 가자고 했다. 노숙인들 속에서 밥도 먹고 거기서 알던 사람들도 궁금하면 찾아 보자고 했다. 어느날 정씨가 서울역 근처 교회에서 같이 숙식을 하던 사람이라고 소개를 한다. 정씨가 소개한 장씨는 오랫동안 장애인 시설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어떤 여자를 알았고 그 여인의 오빠가 와서 책임지라고 하는 바람에 도망 나와서 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한다고 하니 들어갔다고 한다. 장씨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먹을것도 없었고 식구가 많아 중간에 끼어 있던 장씨는 항상배가 고팠다고 했다. 그래도 형이 다니던 회사에 심부름 하며 다니다가 어느정도 일을 배워 직원이 되었다. 철사를 엮어서 석쇠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형이 그일을 그만 두면서 저절로 그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고생을 하였고 술을 잘못배워 사람들과 싸우는 주사가 있어서 항상 문제를 만들었다. 술먹고 여동생이 버릇없게 군다고 때렸고 옆에 있던 식구들하고 실갱이를 하다 넘어져서 손가락이 꺽였다. 아직도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욱하는 성격이 지금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동체에 같이 가자고 하니 쉽게 따라 나섰다. 교회 생활이 녹녹치 않았다. 새벽기도로 시작하여 서울역 광장의 예배에 참석하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등을 참석해야하고 주방일도 해야했다. 무서운 집사님이 계시는데 부엌에 조금만 정리를 잘못해도 화를 내서 항상 긴장하고 살았다고 했다. 신월동 공동체는 4명이 살기에는 좁은것 같았다. 그들 특성 상 맞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싸움이 일어나고 역 효과가 날것 같아 방을 하나 더 얻으려고 하니 매달 내는 월세가 염려가 되었다. 교회에 도움을 청하고 한달을 기다렸더니 교회에서 남성 선교부에서 그들의 사역으로 노숙인 사역을 하기로 하고 방세를 내주겠다고 했다. 새롭게 얻은 2공동체는 교회 소속이 되었다. 담당 장로님과 부목사님이 찾아왔고 관리를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게 진행이 되는 것이 걱정 스럽기는 했지만 재정문제가 있어서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하고 교회의 행사에 참여하는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얼마동안은 교회 성도들과 잘 지내고 순간 좋아지는것 같이 보여 모두들 환영하고 좋아했다. 시간이 가면서 걱정했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회의 기도방은 철야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곳이다. 교회를 모르던 공동체식구들이 교회의 안락한 기도방을 가보니 술먹고 들어가서 잠을 자기가 좋았던 것이다. 술을 먹으면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새벽에 술먹고 기도방에 가서 자는 모양이었다. 교회내에서도 신앙심이 차이가 있어서 노숙인이나 출소자들을 품을 수 있는 정도가 달라서 의견이 갈라질 수가 있다. 굳이 노숙인 출소자를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 많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일들이 모여서 공동체가 좋지않은 이미지로 소문이 났고 교인들이 무서워서 기도방에 가지 못하겠다고 민원이 들어가는 바람에 공동체 식구들의 기도방 출입금지가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교회는 그 일로 인해 공동체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 후로 자체적으로 회의를 하였고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기도방에 출입을 금했으며 되도록이면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바로 집으로 귀가 하도록 하엿다. 이러한 일들은 공동체를 맡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위기 의식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3사람이 더 들어왔다. 교도소에 경제 사범으로 들어 갔다가 나온 사람으로 기획부동산의 바지 사장으로 있다가 문제가 생겨 교도소를 다녀온 임씨가 있었다. 알콜 중독으로 일을 지속하지 못하고 있어 방값을 못내서 쫏겨난 이씨와 그중 나이가 35세 되는 어린 청년이 있었는데 전과가 4범인 박군의 빡빡깎은 머리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아버지는 해병대를 제대한 사람으로 동네에서 이장과 민간인 소방대를 이끌었고 아버지를 거치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정도로 힘이 있으셨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부동산투기를 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위의 형은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대학도 나와 공무원이 되었지만 나이가 40 가까이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성격이 불같은 아버지와는 마음이 맞지 않아 자주 싸웠다. 박군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것이 모두 엄마 탓이라고 하여 박군은 부모님이 함께 있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불화가 계속되면서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횟수가 많아졌다. 부동산 투기하면서 산 집을 팔고 그 돈을 다 들고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고 했다. 교도소에 들어가고 사고를 칠때마다 한번씩 면회를 왔던 엄마가 어느때부터 겨우 주소만 알고 있을정도로 발걸음이 뜸해졌다.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집을 나왔을때 어머니를 찾아 갔다. 방을 얻는다고 돈을 좀 달라고 하니 밥한끼 사주고는 돈이 없다고 가라고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원망하며 평생 볼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어쩌면 하나같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살아 왔다. 박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과거가 생각이 나서 아들처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동체 이외에 방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기존의 공동체 식구들이 만만치가 않아 한집에 살게 되면 청년이 견디지 못할 것을 대비해서 혼자 머물도록 하였다. 마음이 안정이 되었는지 나를 만나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국민 학교때 부터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다니고 놀았던 기억이 많았고 중학교를 오면서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과 패싸움이 일어나 친구를 때려 한쪽눈이 실명하게 되는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로 인해 소년원으로 가서 3년을 살고 나왔다. 그때부터 소년원에서 알고 지낸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고 공사판에 일용직을 따라 다니면서 그곳에서 소개받아 시스템 도어를 하는곳에 보조로 따라 다녔다. 시스템 도어에 같이 다니던 형들은 교도소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형들이 사주는 밥도 얻어 먹고 술도 얻어 마시고 하다보니 한탕하면 당장 목돈을 만질 수 있다고 해서 집털이에 가담 하였다. 그러나 덜미를 잡혀 교도소에 들어갔고 1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교도소를 나와 집에 들어갔다. 독립해서 살고 있었던 형이 들어와 있었다. 형은 무뚝뚝 하지만 정이 있었다. 아버지도 돈벌이가 없으니 형이 벌어온 돈으로 생활을 하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집안 샬림을 하시는 편이어서 집에 돌아가자 돼지고기를 듬뿍넣은 김치찌게를 해주셨다. 아들을 보니 반갑다는 뜻으로 받아들었다. 개인 정보가 들어있는 문서를 배달해주는 일에 가담 하여서 일을 하다가 나에게 줄 돈까지 혼자서 다챙겨간 놈을 죽도록 패서 경찰에 폭행으로 잡혀가서 1년을 교도소에 다녀왔다. 전과 4범이 되었다고 한다.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알콜 중독이었으며 담배를 사주고 잠자리 제공하니 붙어 있었다. 교회에 한 장로님이 유리샷시문을 달아 주는 사업을 하는데 장로님께 부탁하여 간간히 알바를 하도록 하였다. 장로님은 그들의 상황을 잘 알기때문에 일을 잘하지 못해도 용돈을 챙겨주는건데 불만이 많았다. 자기들이 일용직을 나가면 15만원 20 만원은 받는다고 허세를 부렸다. 그렇게 생기는 돈으로 필요한것을 사는것 같았다. 일을 꾸준히 하면 다른 일자리도 알아 볼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게으르기도 하였고 푼돈이라도 얻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자존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망가진 상태였다. 사람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는 상태에 이르면 차라리 죽는것이 낫지 않을까. 담배 한가치씩을 받으면서 교통비 받아가며 그것으로 술을 사 먹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의문스럽다. 나도 모욕감을 느끼는데 저들은 그걸 감추고 있는 것일까? 삶의 목표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반인들은 이해 할 수도 없는 그런 삶이다. 그러나 노숙생활은 부끄러움도 없어지고 그 생활에 적응을 하게되면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 벌써 찬바람이 가시고 불어오는 바람에 봄 냄새가 난다. 나는 집을 따로 마련해서 살고 있지만 1공동체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2,3 공동체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내가 주로 머무는 1공동체에는 동네에서 술먹고 노숙하는 사람들 몇몇이 나를 보러 온다. 담배가 떨어졌거나 먹거리가 떨어졌거나 하면 찾아 오는것 같다. 그러다 몇천원 쥐어주면 술을 사먹는다. 그렇게라도 주변에 머물도록 한다. 그러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면 그들에게 상담을 하는 기회가 되기때문에 항상 문을 열어 놓는다. 두번째 공동체는 정씨와 김씨 그리고 장씨가 함께 지낸다. 교회가 관리를 해서 학력이 있고 나이가 있는 사람들을 배치했다. 장로님과 부목사님이 방문하셔서 예배를 드리면 순종하고 따라히는 사람을 배치 한것이다. 장로님이 오셔서 간식과 반찬을 가져오시면 다른 공동체가 모여 배분하여 가져 가도록 하며 함께 예배를 드린다. 대부분 그자리를 피하여 늦게 와서 반찬을 가져가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어서 장로님이 다같이 모이도록 요청 하셨다. 예배를 마쳤는데도 특별한 말씀이 없었고 저녁에 다같이 외식이 있다고 만 하셨다. 오랫만에 식구들이 삼겹살을 맘껏 먹었다. 회식이 끝날 쯤 해서 교회방침이라며 올해까지만 지원을 해주기로 한다고 한다. 1년이 지나가면서 교회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회의를 느껴서인지 교회가 후원을 하는것이 어려워 질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는 말이 있었고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공동체를 해체하는것은 내년에 일어날 일이고 내가 담당하고 있으니 먼저 상의를 하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들에게는 공동체 식구와 같은 존재로 비춰지는것이 아닌가하는 모욕감도 느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생기는 못난 생각은 지워야 한다고 다짐하며 나 또한 저들과 나를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헤어지고 나니 씋쓸함이 몰려왔다. 자존심이 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늘은 그들이 있는 곳을 피해 집에 들어갔다. 내가 사는곳은 그들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과 선을 긋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데 교회 성도들은 오죽할까 하는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스스로를 달래 본다. 그나저나 내년부터는 교회 지원이 끊어지니 혼자 해내야 하는데 약간의 염려가 감상에 젖어 울적해진 마음을 긴장시키며 현실로 돌아 오게 하였다. 공동체 식구들을 자활 시켜야하는데 그들에게 맞는일이 있을까 그들이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을 생각하면 어림없는 일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생각에 젖었다. 그들은 며칠은 나가서 일을 하지만 술을 먹고 잠수를 타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비해 돈을 작게 준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일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나가지 않는 일이 허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 생각한다. 그들은 게으르고 나태하면서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현실에 벗어나 과대 망상의 시작점이라 할까. 노숙이 정신 질환자로 분류되는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책임감있는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개를 한다는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자신들이 한일에 비해 지불하는 금액이 너무 작은것에 불만이 있기 때문에 소개해준 사람이 민망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평소에는 새색씨 같이 얌전한 사람도 술울 먹으면 사업주에게 노동력을 착취한다고 하면서 노동청에 신고 한다고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몇번의 시행 착오가 있고 난 다음에야 함부로 일자리를 소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동체 사람을 받아주는 업체는 이미 그런 경험이 있고 또 도우려는 의지가 있는 분들이라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고발한다는 일들이 발생 할때는 미안하고 황당한 마음이 든다. 때로는 내가 보기에도 조건이 좋은 직장에서 숙식 제공을 한다고도 하면서 사람을 소개하라고도 하는데 가려고 생각을 안하고 이제는 공동체 3개가 운영이 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10여 명이 되었다. 나는 서울역을 다니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서울역을 오래 다니다 보니 노숙인을 대상으로 단체가 생기고 단체가 숫자를 늘려야 정부지원을 받을 수가 있어서 그들의 재활과 회복에는 신경을 쓸겨를이 없었다. 때로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으로 병원들이 노숙인을 상대로 입원을 권유한다. 노숙인들은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병원은 노숙인 숫자만큼 정부지원 의료보험 청구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과 병동이 있는 지방병원이나 입원할 수 있는 병원등 노숙인이 한 두달 입원 하면서 겨울이나 여름을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겨울이나 한여름이 되면 서울역 주변의 노숙이 수가 줄어든다. 서울역에 노숙인 등록이 되면 의료보험 공단에서 국가지원금이 나와서 노숙인은 개인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입원을 할 수 있다 병원 사회복지사가 나와 노숙인을 설득하고 태워서 간다. 때로는 바로 갈 수 없을때는 주소를 주고 택시를 타고 오면 택시비를 지원한다. 한달 그리고 두달을 있기도 한다. 환자를 오래 입원 시키기 위해 그곳에서 일거리도 소개 해준다고 하는데 일을 할정도의 노숙인은 흔하지 않다 1공동체에 가끔 왔다갔다하는 청년이 있다. 밥을 무서울 정도로 많이 먹는 청년이다. 밥을 적당히 먹도록 해야하는데 잘먹는다고 공동체 식구들이 남긴음식을 다그 청년에게 주는것을 보았다. 그러면 안된다고 하였는데도 불쌍해서 많이 먹으라고 주는거라고 한다. 말려도 소용이 없는 식구들의 행동에 화가 나지만 일일이 간섭 할 수 없는 것이라 걱정만 될 뿐이었다. 그 청년은 6년째 노숙을 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엄마는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잔소리가 많은 아버지를 피해 공원에서도 자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폭행을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역으로 왔다고 한다. 그렇게 서울역에서 지내다가 서울역 살이가 익숙해질 무렵 어떤 친절한 사람들이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면서 같이 가면 일도 많이 안해도 되는 택배 회사인데 물건을 차에 실어주기만 하면 먹여주고 잠자리도 제공 한다고 하면서고 친절하게 하면서 삼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따라 갔다. 물건이 많이 있고 화물차도 있었는데 취직하려면 주민등록증을 주라고 했다. 며칠을 맛있는것도 주고 일도 안해도 그냥 사무실만 지키면 된다고 하여 주민등록증을 주었다. 서류에 지장을 몇군데 찍었는데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날마다 짜장면도 사주고 돈까스도 사주면서 잘 지냈다. 일도 시키지 않아서 이런곳도 있구나 했다. 한달쯤 지났는지 더 지났는지 모르는 시간이 지났다. 여름이라 바닷가에 놀러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한참을 가다보니 사람들이 많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음료수를 사주면서 차를 주차장에 잘 대고 오겠다고 잠깐 있으라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었다. 배도 고프고 그 사람들이 올것 같지 않았다. 해뱐 옆에 파출소가 있었다. 서울에서 왔는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차비를 달라고 했다. 경찰은 짜장면 한그릇을 사주고 서울갈 차비라고 2만원을 주었다. 밤이 되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뒷날 서울역에 돌아 왔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 했지만 그동안 잘 대해주고 편하게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노숙인들 중 그런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많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몇천만원씩 빚이 있다. 그들이 수급을 받으려고 주소를 어딘가에 등록하고 절차를 밟으면 그 주소지로 명세서가 날라온다. 빚이 있다는것을 그때서야 알기도 하고 영영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수급이 되면 압류 방지 통장으로 국가 보조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 노숙인들에게서도 사기를 치다니 놀라운일이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길이 분명히 있을 텐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다. 요즈음은 휴대폰이 일반적인것이되어 휴대폰을 개통해준다고 하여 개인정보를 알아내서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고기잡이 배에 잡혀가기도 했다고 한다. 몇달씩 망망대해에서 조기잡이를 하는데 조기를 잡으면 굽기도하고 매운탕을 끓인다. 한달 내내 조기를 먹었다. 새우잡이에도 가고 염전에도 갔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를 잘모르고 인지가 떨어진 사람들을 이용한 범죄가 다양하다. 가끔 텔레비젼에서 특집으로 방영되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들이 이곳에서는 낮설지 않은 이야기 거리이다. 어느날이었다. 장로님이 공동체 식구들이 알도 안하고 교회도 잘 안오니 그들이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하시면서 아는분이 심리 치료를 하니 한번 모여보면 어떠냐고 했다. 교도소에 있을때 교화를 목적으로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때 들어본 듯했다. 그러나우리에게는 심리 치료나 상담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우선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담배값 그리고 핸드폰 비용을 지원 해준다면 모를까 생각했다. 그러나 장로님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서 1,2,3공동체 식구들을 모았다. 교회에 딸린 커피숍에 모였다.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일회성으로 모인 것이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성은 자신을 어느 미술치료 연구소 소장으로 소개 하면서 장로님과의 친분을 이야기 했고 미술치료에 대한 설명을 했다. 심리 치료나 교육과 무관하게 살아온 노숙인들에게 얼마나 친숙하게 다가올지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소장이라는 여성은 종이 한장씩을 나눠주면서 앞에 있는 색연필로 아무렇게나 그려보라고 한다. 미술이라는 고차원적이고 생소한분야였지만 종이에 마음대로 그리는 것은 부담이 없었고 모두 열심히 그린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니 한사람씩 무엇으로 보이는지 말하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우습고 재미있는 그림놀이에 빠져 한시간을 쉽게 보냈다. 한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이러한 형식을 갖춰 해본적이 없는 공동체 식구들은 먼 여행을 다녀온 듯한 해방감을 느꼈고 즐거운 하루가 되는 경험을 한것이다. 나는 그 소장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동체 식구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다음번에도 참석을 할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모두 찬성을 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교회에서하는 행사에 참여하여 모두 선물을 받고 즐거워 했지만 물에 섞이지 않은 기름처럼 공동체 식구들은 어색했다. 우리는 교회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다들 집에 돌아와 크리스마스를 텔레비젼을 보면서 지냈다. 각자 선물을 뜯어보기도 하고 다른 선물을 바꾸기도 하고 나눠주기도 했다. 오늘 같이만 조용하고 평화스러우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우리는 다시 미술치료 시간을 가졌다. 부담 없고 재미있는 놀이와 같은 미술치료 시간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만 하는 미술이라는것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면서도 맨정신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미술치료를 한다는 자체가 자존감을 올려주는것 같았다. 담당 장로님에게 공동체가 미술치료를 좋아하고 훨씬 안정되어가고 있으며 할일이 없어서 술만 마셨는데 미술치료하면서 대화를 하는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하였더니 담당 부목사님과 미술치료 소장님을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미술치료 소장님은 서울역 선교 단체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미술치료를 해왔다고 했다. 이제야 우리 공동체가 편안하게 미술치료를 받아 들인 이유가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미술치료 소장님과 우리는 매주 토요일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 놓았고 미술치료를위해 다음주를 기다리는 듯했다. 해를 넘기고 우리는 소장님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봄이 되면서 장로님과 부목사님은 공동체에 대한 미련을 가지면서 교회에 지속적인 지원을 해 줄것을 말씀 드리는것 같았다. 그러나 교회가 금전적인 지원을 못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식구들이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것이 문제라는것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강요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미술치료 소장님의 시골집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부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내차로 공동체 식구들을 태우고 야유회겸 시골에 내려간것이다. 그곳은 한적하면서도 아늑했다. 소장님 소유의 땅이 3000여평으로 다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소장님이 준비해주신 바베큐 파티는 우리 공동체 식구는 물론이고 장로님과 부목사님 그리고 같이 동행한 봉사자들에게도 더 없이 즐거웠고 감사한 하루였다. 장로님과 부목사님은 이런곳에서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농사도 짓고 지내면 좋겠다고 이야기 하였고 나도 그러면 좋을것 같았다. 그러고 만남이 뜸하던 어느날 장로님과 부목사님이 만나자고 하였다. 소장님과 상의하였는데 일년간 땅을 무상대여 해주기로 했다고 하면서 공동체 식구들과 농사를 지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무일도 안하고 있는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면서 공동체 식구들을 모아서 이야기 해보라고 하였다 만일 모두 동의 하면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재정문제는 부목사님과 장로님이 개인적으로 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교회에서도 관심을 가질거라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아무일도 안하고 사는것보다 우리가 무언가 해보기로 하자 고구마를 심을 건데 함께 하면 좋겠다라고 설득을 했고 대부분 찬성을 하여 고구마를 심기로 했다. 공동체 식구들은 농사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한번도 농사를 지어보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던지 고구마 농사를 어떻게 지으면 되는지 자기들 나름대로 알아보기도 하고 농사를 짓다가 노숙인이 된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하여 각자가 모두 고구마 농사꾼이 다된것처럼 이렇게 한다더라 저렇게 한다더라하고 주장을 했다. 5월달이 되어서야 일은 시작이 되었다. 장로님과 부목사님의 지시에따라 우리는 움직이기로 하고 10여명이 참가하기로 했다. 3000여평에 고구마를 심는다는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을 해도 가는데 2시간이 넘었고 때로는 3시간이 걸리기도 하였다. 고구마를 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자기들이 들은 방법대로 고집을 하며 물을 주고심어야 한다 아니다 심고 물을 줘야한다느니 내가 옳다 니가 옳다 하면서 고구마 모종을 심었다. 일을 안해보던 사람들이라 고구마 모종 몇개 심고 담배피우고 하는 모양이 고구마 모종을 심는다기보다 놀이를 하는듯해서 고구마 농사가 잘될지 걱정이 되었다. 소장님은 고구마도 함께 심기도 했지만 간식을 만들어 주고 음료수도 가져다 주셨다. 농사가 힘들다는것을 처음 알았다. 고구마 모종을 심는다고 다 되는것은 아니었다. 물도 줘야하고 풀도 제거해야한다. 나는 몸이 좋지 않아 힘이 들었다. 고되어서 일어나기도 힘들었지만 약을 먹고 버텼다. 공동체 식구들이 희망에 차있었고 이렇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일이 줄었다.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았다. 비교적 나이가 젊고 전문대까지 나온 김씨가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한달에 한번정도 고구마 밭에 가서 풀도 뽑아주고 물도주었고. 오고 가면서 휴게실에 내려 군것질도하고 밥도 먹고 했다. 집에서 텔레비젼만 보고 뒹굴거리던 때하고는 많이 다른 생활이었고 농사에 대한 이야기며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되었다. 나는 여전히 고구마 수확이 염려가 되었다. 뜨거운 여름에도 우리는 풀을 뽑았고 고구마는 그런대로 밑이 들어가는것 같았다. 찬바람이 제법 불어 오는 것 같다. 교회에서 공동체 지원이 끊길 때가 다가온다는 생각에 은근히 걱정이 많았다.. 교회가 지원하는 2공동체 식구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부딪히고 운영이 어려울것 같은데 때가되면 그렇게라도 해야된다. 곧 추석이 올건데 그전에 고구마 수확을 하자고 하였다.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우리 고구마를 팔아보자는것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재개발지역이라 방을 비워야한다고 했다. 고구마를 팔아 수확이 되면 우리가 다른 장소를 옮길때 도움을 줄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러한 고민을 뒤로하고 고구마 수확을 하기로 했다. 쌀쌀하고 건조한 날씨탓에 감기기운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고구마 수확을 하러 가는데 못간다고 할 수가 없어 몸이 좋지 않았지만 새벽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하루종일 고구마 수확을 하고 바로 돌아오지를 못하고 교수님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뒷날 우리는 고구마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박스 작업을 했다. 교회 바자회로 갈 박스를 골라놓고보니 좋은것은 얼마되지 않았고 판로가 없으니 농협에 헐값으로 넘겼다. 교회로간 바자회 물품은 싸게 팔아서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목사님과 장로님이 500만원씩 투자하여 공동체 식구들 오가면서 밥먹고 간식사먹은 비용 교통비를 계산해보니 400만원이 적자거 난것이다. 농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시작한 공동체 고구마 프로젝트는 우리 공동체의 존폐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었는데 손해를 보았고 앞날은 뻔했다. 엎친데 덥쳐서 사회복지를 공부 한다고 하던 공동체 식구가 교회 어느 자매를 좋아하여 쪽지를 준 일이 소문이 나고 스토킹을 한 사건이 생겨서 교회에서는 연말이 되면서 공동체에 대한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건의로 인해 공동체는 더 이상 교회의 사역으로 할 수없다는 결론으로 2공동체는 더이상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찬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심한 감기로 숨을 쉴 수 없게 기침이 나고 가래가 끓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바로 입원을 권하였고 열이 40도가 넘어가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입원을 한지 2주만에 퇴원을 하고 돌아오니 부목사님과 장로님의 결정으로 2공동체는 없어졌고 1공동체와 3공동체는 집세가 밀려 있었다. 수급자는 병원비가 무료이다. 이런저런 비급여 검사로 나온 병원비는 동사무소 사회복지과의 도움으로 해결이 되었다. 밀린 집세를 지불하고 나니 남은돈이 없었다. 이일을 지속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구마 농사는 망했지만 농사를 짓던 즐거움을 알게된 공동체 식구들에게 또다시 그런 기회가 오면 좋을것 같았다. 염치 불구하고 미술치료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농사를 짓던 땅을 이용해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자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내년에는 우리가 더 이상 서울에서 공동체를 할 수 가 없게되는 사실을 말했다. 장로님과 부목사님과 상의해보고 연락을 주기로 했다. 공동체 식구들은 노숙을 하면서 온갖 경험을 하였다. 종교집단에서 운영을 하는곳에서는 새벽기도 주일예배 집회등을 참석해야했고 그렇지 않은 단체도 나름의 규율이 있어 그나마 그걸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공동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자유를 원하면 거리를 나와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비참했던 나의 유년 시절에는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악함은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존중하는것에 인색하다. 시대적으로 불행한 일을 당한 과거의 나의 유년 시절은 어느누구도 보상해주지를 않는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부끄러운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고 그런 트라우마로 인해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가 언제 어디서든 상황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기를 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때로는 죄있는 사람은 오라는 그말이 오해가 되기도 하는데 죄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서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교회가 전도를 목적으로 하여 너무나 쉽게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곳도 사람의 방법으로 운영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 공동체가 교회에서 없어지는것에 아쉬움이 있었다. 교회가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원칙에서 벗어난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원칙을 지키는것은 때로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나아가야하는 책임이 있고 나 또한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기로 했을때 굳게 다짐했던 일이다. 원칙은 변함이 없어야한다. 그리고 어디서나 원칙을 따르면 문제가 없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뉘우치고 돌아 올 수 있는 힘을 길러야한다. 그건 주변의 좋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알콜중독이다. 알콜중독은 치료가 어려운 정신질환으로 분류가되고 환자가 치료하려는 의지가 강해야 된다. 그들은 한번 정도 정신과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었으며 결혼을 한 사람은 이혼을 하고 노숙인이 된 경우가 많다. 나도 오랜세월 술을 먹었고 지금은 몸이 망가져서 술을 마시지 못한 상태가 되었지만 술과 담배를 끊으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몸이 아무리 아파도 술을 먹는것이 알콜중독이다. 그들은 알콜 병동에서 있었던 일들을 영웅담처럼 이야기 하곤 한다. 요구르트를 가지고 발효를 시켜 술을 만들어 먹기도하고 술 반입이 안되는 병동에 까지 술을 가지고 들어가는 방법도 다양하다. 콜라를 절반을 먹고 그 속에 술을 넣거나 종이로된 쥬스통을 뜯어 술을 넣어 정교하게 붙여 새것처럼 반입을 한다. 그러나 지방 알콜병동에서는 술울 아주 못 먹게하면 도망가기때문에 가끔 핑게를 대고 술을 먹게 한다든가 티가 많이나지 않으면 봐주는 경향이 있다. 알콜중독은 폭력을 동반한다. 이를 주폭이라고 한다. 알콜중독이 심해지면 술을 많이 먹지 않아도 금새 취하기도하여 많이 먹지 않아서 괜찮다고 하지만 이건 이미 알콜중독의 심한 상태를 말하는것이므로 더 심각한것이다. 이러한 알콜중독으로 인한 폭력은 벌금형을 받아 벌금을 내지 않으면 구치소를 가서 벌금을 탕감하기도 하고 돈이 없으면 벌금이 쌓여가서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가서 자포자기하는 삶이 되어가는 것이다. 1공동체에는 내가 주로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들이 와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자기들을 돌봐주는 나에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때문에 그곳을 더 지키고 있었다. 때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거친 사람들이었고 술이 깨서 들어 온다고 해도 술에 취하면 욱하는 성격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서 잠을 자고 들어온 김씨가 라면을 끓인다고 덜거덕 댔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한다고 한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던지 들고 있던 라면 냄비를 던지고 급기야를 부엌에 있는 물건으로 상대방에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고 급기야는 칼을 들고 난동을 피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을 불러서 사태는 진압이 되었지만 상처로 피범벅이 되어 병원을 가는 상황까지 되었다. 다행히 경찰서에 가서 서로 화해하고 합의하에 풀려났지만 둘은 퇴소를 시켰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장소로 분리하여 돌보면 좋았겠지만 공동체가 하나 없어지고 좁은 곳에서 지내게 되니 더욱 스트레스가 쌓인것이라고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주는 경고로 퇴소를 시킬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다른곳에서 정착을 하고 죄송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교도소를 출소한 사람과 노숙인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출소자는 안정된 환경과 일자리가 주어지면 재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범법자에게 주어지는 잣대는 야박하고 쉽게 용납되지 않아서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들이 스스로 노력하고 심리치료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줄아는 방법을 찾고 사회적응 프로그램이에 참여하여 교화하는데 힘써야하며 사회도 더 넓은 아량으로 그들이 적응하도록 교육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공동체 식구들의 유년시절은 대부분 불행했다. 시골에서 부모님의 관심 밖에서 자라고 가난하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가난하여 경제적인 문제로 부모가 이혼하는경우였다. 유년기에 양육자의 보살핌이 결핍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고 도덕성이 결여되기도 한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정상적인 사회화가 되지 못하고 성장 하면 사회 부적응자가되고 스트레스에 취약하여 어려움을 견디는 힘이 없어 자신과 상대방을 어렵게 만들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좋은 어른이 되어야 그래야만 다음세대가 고통을 덜받게된다. 나는 이 공동체를 꼭 바로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죽으려고 했던 과거에 나를 살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나아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오늘도 서울역을 나간다. 요즘들어 몸이 말을 듣지 않은것 같다. 밤에 잘때 몸에 쥐가 많이 나고 고통스럽다. 서울역에서 돌아와 한기가 들어 집에 돌아왔다. 할 수 없이 3공동체에 있던 박군을 불렀다. 누군가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알고 있어야 할것 같았다. 박군이 나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아들에게도 받지 못한 효도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날이 새자 병원을 간다고 하니 박군이 따라나왔다. 병원을 가서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신경과를 가야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신경과에서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파킨슨씨병 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생소한 병명이지만 걱정이 엄습했다. 피검사를 하고 엠알아이를찍는다고 했다. 비싼것은 안하겠다고 했지만 병명을 알기 위해서는 뇌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 어쩔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한 날이었다. 앞으로 할일이 많은데 아프다니 앞이 막막했다. 죽으려고 했을때는 아쉽지 않던 목숨이 이제와서 살아갈 목표가 생기고 남은 목숨을 소중하게 사용하겠다고 하니 더 심한 병을 얻게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하는 소원이 생겼다. 며칠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박군도 내옆에서 함께 있으면서 내 수발을 들어 주었다. 몸도 좋지 않은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염려를 하고 있을때 장로님께서 연락을주셨다. 시골의 집은 거의 비어 있으니 방법이 생길때까지 그곳에서 지내도 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의 시골 공동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2월이 되어서야 세들어 있던 공동체를 정리를 하고 시골로 갔다. 서울을 떠나기 싫다는 몇사람은 남아서 공동체 하나가 세가 끝날때까지 머물다가 떠나기로 하고 10명이 옮겼다. 10명 옮겨가는데도 짐은 보따리 하나씩이다. 서글픈 짐보따리가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졌다.
시골은 서울 날씨보다 덜 추웠다. 갈곳 없는 우리를 맞아준다는 생각에 따뜻하게 느껴서 일것이다. 시골 들판의 바람은 횡하고 빈논이나 밭은 눈이 덮여 있고 길바닥은 얼어 있었다. 우리는 저녁무렵에 도착하였는데 저녁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골은 식당도 일찍 문을 닫고 가게도 우리가 머무는곳에서 1킬로는 떨어져 있어서 담배도 술도 사기가 어렵다는점이 우리에게는 장점도 단점도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골 생활이 시작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자유롭게하고 10시쯤 미술치료를 한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자유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심심하다 싶은면 다 함께 차를 타고 주변 구경도 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두 세달을 그렇게 지냈다. 늦잠을 자도 좋았고 하루종일 자도 좋았다. 그리고 밥을 하고 설걷이를 하는 일은 서로 나눠서 했다. 봄이 되어가는것 같았다. 미술치료 선생님이 한분 더 오셔서 우리와 함께 비누도 만들고 향초도 만들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동안 소장님도 고민이 많으셨을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우리가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시는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소장님에게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에대해 말하고 소장님을 설득해보려고 노력했다. 이런일을 쉽게 하겠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는 갈곳이 없다고 말하면서 나의 건강 상태를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냥 듯고 있는듯 했지만 일이 되어가는것은 매우 긍정적인 느낌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결정을 할 수 없는 처지라 되는대로 미술치료로 만드는 작품들을 속없이 즐겁게 만들며 지냈다. 2,3달이 지나면서 재미있고 한가로운 여행을 온것처럼 지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을 하는데도 우리는 아무 결심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소장님이 나를 좀 보자고 하셨다. 나를 집사라고 부르면서 “집사님이 아프시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데 제가 돕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농사를 잘모르는데 5월이 되면 고구마를 심는다는데 다 함게 심어 보도록 하죠” 한다. 앞날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모든것을 책임지고 10명을 먹여 살리겠다는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담배값을 주고 무제한 통화가능한 핸드폰을 5대를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농사를 시작하면 그들이 노동에 대한 댓가를 요구할것인데 담배값 그리고 핸드폰 , 숙식제공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한다음에는 그때가서 생각해 보자고 하는데 마음속으로 너무 감사했다. 지금까지 몇달을 지나면서 10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평안하고 행복한 날을 보낸것만 해도 감사한데 제시하는 조건은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는 한사람씩 면담을 하자고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고 앞으로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알아야지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고 심리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서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체계적인 공동체 생활이 시작이 되는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었다. 소장님은 별 관여는 안하셨지만 미술치료 선생님 한분을 붙여주셨다.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다정하게 해주셨고 우리를 서울역에서 마난 사람들이 아닌 이웃 아저씨를 대하듯 친절하게 보살펴주고 때로는 맛있는 요리도 해주셨다. 천사가 있으면 그런 모습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뭏든 이곳에서는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
5월5일 우리는 고구마를 심는 날을 정했다. 우리는 농사를 모르기 때문에 농업기술 센타에 모두 몰려가서 교육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몇은 내차에 태워 주위를 돌아보며 고구마 심은곳이 있는지 돌아보기도 하였다. 서울 교회에도 알리고 봉사 할 사람을 불렀다. 고구마 순을 사다가 소독약을 탄 물에 담가야 된다고 하면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공동체 식구들이 희망이 넘쳤다
날씨를 보니 비가 온다는것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시작하는 농사인데다 봉사하는 사람들도 온다고 하는데 취소를 해야하는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우리를 불상히 여기실 하나님을 믿어보고 기도를 하면서 밀고 나갔다. 새벽부터 꾸물거리는 하늘을 몇번씩 쳐다보면서 마음을 졸였다.. 점심을 먹고 나니 구름낀 날이지만 고구마순을 심느라 허리를 굽혔다 일어나는 일과 순을 나르는 일이 상당히 더웠다. 오후가 되면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비가 쏟아지면 일을 마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빨리 서두러 하자고 재촉을 했다. 그런데 밭 저건너 저수지쪽에서 비가 내리고 우리쪽으로 바람이 불어와 시원하면서도 기분좋은안개비를 맞으며 일을 마치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은혜라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감사했다. 몸이 아픈줄도 모르고 하루종일 뛰어다녔으니 이것도 기적이라 생각했다. 공동체 식구들도 몸은 힘들었지만 희망이 넘쳤고 즐거워했다. 한가지씩 주던 담배도 부족하지 않게 피울수 있고 핸드폰도 마음대로 쓸수 있어서 유투브나 동영상을 볼 수가 있어서 모두 만족을 하면서 지낼 수가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생각 할 수 없었던 생활이었다. 이렇게 가족처럼 살아가는것도 좋을것 같았다. 우리 모두 얼마만에 맞는 평화스러운 날들이었고 감사가 넘쳤다. 풀을 매는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당번을 정해서 풀을 매기도 하고 담배를 안피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용돈으로 군것질을 사다 먹기도 하였다.
여전히 나는 서울역을 다녀야 했다. 그것은 나의 사명이었고 내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으며 그곳을 한바퀴 돌고 새로 만난 사람들과 몇마디 안되는 대화를 하더라도 시골 공동체로 인도 하면 지금 같은 평안을 누리며 새롭게 되는 사람들이 분명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공동체 2개의 월세를 책임지던 때보다는 한껏 가벼워진 마음이고 경제적인 부담을 덜 수 있어서 좋았지만 여전히 시골과 서울을 왔다갔다하며 드는 교통비와 유류비는 월세로 나간 돈과 맞먹는 수준의 비용이 들었다. 시골 공동체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감당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적과 같은 시간이 흘러 가는듯 했다. 안정이 되어가고 주소가 확정지어지니 이들중에 수급을 만 들 수 잇는 사람은 수급을 만들어서 자립을 하도록 만들고 우리 공동체 주변에서 살면서 도울 수 있는것은 도우면서 살면 좋을 것 같았다. 가장 유력한 사람은 정씨였다. 우선에 나이가 많았고 알콜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한 경력이 있고 지금도 정신과 병원의 약을 먹고 있어서 가능할 것 같았다. 수급을 받는것도 정확한 거주지가 없으면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일먼저 필요한 것은 근로 능력 평가서인데 병원 의사선생님이 판단하여 발급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병원을 다닌지 6개월 이상 되어야 발급을 해준다고 하니 답답했다. 그래도 병원을 꾸준히 다니기로 하고 김씨, 주씨, 최씨, 모두 정신과 병원을 같이 다니기로 했다.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 비용도 소장님이 다 내어 주고 병원도 데리고 갔다. 그렇게 반년이 훌쩍 지났다. 정씨는 근로 능력 평가서를 받게 되었고 수급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에서 부터 생기기 시작 했다. 다 같이 없을때는 괜찮았는데 비교할 상대가 생기고 정씨가 기분이 좋아서 한마디 하면 잘난척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고 패가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젊은 축에 들은 최씨는 주변의 사람들을 끄는 무언가 있었다. 내가 젊어서 깡패 소굴에 있을때 양아치 처럼 사람들을 꼬여 자기편을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패를 만들고 싸움이 일어나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마음 속으로 염려가 되었다. 이제 정시를 분리 할때가 된것 같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시기가 맞지 않았고 고구마 추수를 하는데 한사람이라도 같이 있으면 좋을것 같아서 시간을 끌었던것이 화근이 되었다.
최씨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고 정씨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정씨를 달래고 하여 겨우 추석 즈음이 되어 고구마를 추수하기로 하고 힘든 과정을 겨우 마칠때쯤 서울 교회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우리는 고구마를 싣고 우리 공동체가 있었던 신월동 교회를 가서 바자회가 끝날때 쯤 최씨와 몇명이 이탈하여 없어졌다. 정씨가 교회 사람들과 만나서 수급을 받게 되었고 잘 지낸다고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에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고구마 농사는 도 맡다 시피 하면서 고생을 했는데 돈이 있으니 옷을 좋게 입고 얼쩡거리는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바자회가 끝나고 나머지 물건을 싣고 정씨와 함께 돌아오는데 정씨는 정씨대로 속이 상해 있었다.
아무 이유없이 화를 내는 최씨와 자기를 따돌리는것이 괘씸하다고 하면서 씩씩대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된 하루가 지나갔다. 그래도 최씨가 뒷날 돌아 왔다. 그렇게 대면대면 하고 며칠이 지났다. 고구마 농사에 초기 비용으로 트랙터로 밭을 가는데 밭이 넓어서 100만원이 들었고 고구마 순을 사는데 300만원, 고구마 고랑에 씌우는 비닐과 고구마심는 농기구며 물주는 호스등 농사에 들어간 비용이 얼추100만원이 넘을것 같았고, 간식비용등등 으로 손해가 난것이 분명한데도 고구마를 판돈을 기대 하고 있을 공동체 식구들을 생각하면 댓가가 있어야지 될것 같았다.
나는 오래전 제주도에서 일을 한적이 있었다 그곳을 생각하기만 해도 답답한 마음이 탁트이고 좋았었다. 제주도를 가기로 하니 모두들 놀라면서 정말인가 하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뒷날 정씨가 자기는 서울을 좀 다녀와야하니 같이 갈 수가 없을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도 단체로 비행기표를 끊었으니 떠나는날 오라고 시간을 가르쳐주었다. 고구마 농사를 지어서 손해가 난돈을 억지로 준다고 하는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댓가가 없으면 얼마나 섭섭 할까 생각이 들어서 다 같이 떠나는 여행인데 함께 하면 좋으련만 물에 기름이 뜬것 같은 정씨 행동이 야속했다. 그래도 여행을 가는데 혹시 모르니 봉투에 10만원씩을 담아 용돈으로 하고 사고 싶은것을 사라고 하였다. 여행사에서 가는 제주도 2박3일은 공동체 식구들에게는 마음이 많이 누그러지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1년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나라를 여행 하는것 같은 새로운 경험을 한 해였다. 그러는 사이 나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다. 그리고 정씨는 나를 따라 서울 신월동내집 근처로 근거지를 옮겼다. 정씨가 서울로 와서 최씨가 자신에게 했던 야비한 행동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며 이야기를 했다. 고구마 밭에 풀을 매러가자고 하면서 자기를 빼고 간다든가 밥을 먹을때나 간식을 먹을때도 몰래 모여 먹는다는 것이었다. 최씨에 대한것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있었던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하나같이 쓸데가 없고 도와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군대에서 있을때는 부하들 군기를 잡을때는 술을 먹으러 가서 유리잔으로된 술잔을 입으로 씹어먹었던 사람이라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것을 말하려고 하는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공동체 식구를 대하는것이 문제라는것을 모르는것이다. 고정되어있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수 있으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테지만 그게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군대 생활을 한 탓인지 집도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남아 심심해 하는것이 걱정이 되었다. 그건 언제든지 술을 먹을 수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것인데 소일거리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내가 서울에 있는 날에는 집에 와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내가 잘 움직일 수가 없으니 심부름도 해주고 해서 심심치 않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시골에 내려가서 공동체 식구들과 같이 지내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을때였다. 심심하니 등산을 다니다가 산밑에 주막의 여주인을 사귀게 된것 같았다. 말려보았지만 중단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수급으로 받은 돈을 다쓰고도 수급자에게도 발급해주는 카드를 발급하여 몇백만원의 빚을 지게 된것이다. 방세를 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서야 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어쩔 수 없이 방세를 내어주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라고 권하였다.
사람들은 알콜중독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죽어야 말지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말을 부정 할 수가 없다 그만큼 알콜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그 들의 고통 받는 가족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떠 도는 말로는 알콜중독자가 수급을 받으면 2년 안에 죽는다는 소리가 있단다. 그들이 스스로 수급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우여곡절끝에 수급이 된다고 해도 집세 내고 남은 돈으로 날마다 술먹고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알콜 중독은 수급을 받는 조건으로 꾸준히 관리하고 돌봐주는 곳과 연계가 있어야 한다.
인천에 있는 알콜중독 재활센타는 우리나라에 하나 밖에 없을 듯 한곳이다. 알콜 중독센타는 여러군데 있기는 하지만 개개인을 집중해서 관리 할 수 있는곳이 아니다. 돌보는 인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아직 사람중심의 생활시설이 드물다는것은 사실이다. 인상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알콜중독자들의 공동생활가정의 모델로 인천의 알콜중독 재활센타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알콜 중독자이면서 수급을 받은 사람들이 1년정도 살면서 생활습관이나 알콜교육 지역사회와 연결 그리고 직업훈련까지 연결이 되는 프로그램인데 이들의 재활이 어려운 탓에 많은곳에 시설을 만들 수 가 없는것이 단점인것이다.
이곳을 거쳐서 공동 생활 가정으로 연결이 되면 더없이 좋은 알콜중독자 공동 생활가정에서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고 좀더 인간중심의 사회가 된다면 그런곳에 재정을 쓰는것이 당연한 일이 될것이다. 이상주의자가 된다는것은 많은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하는것이 맞는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자신도 수급을 받고 어렵게 살면서 노숙인들에게 담배를 사주고 술과 밥을 사는것은 밑빠진독에 물 붓기식의 일이며 나자신을 돌아보고 현실을 보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았다. 날마다 쇠약해 지는것을 내가 몸으로 느낀다. 몸이 굳어가고 하고 싶은 말은 한참 생각을 해야 하기도 하다. 이제는 연하 곤란이 생겨 물도 먹고 싶은대로 벌컥벌컥 먹지를 못한다.
죽을 힘을 다해야만 할 수 있는것이 내가 서울역을 나가서 노숙인을 만나고 시골의 공동체에 가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잘해보자라고 말하는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는것이다. 이건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다. 나는 매일 써내려가는 일기를 그만 두지 않는다 나의 행보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시골 공동체는 봄이 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씨도 나가고 몇몇 사람이 나가는 바람에 최씨와 그밑에 따르는 몇사람만 남았다. 그래서 농사를 아예 최씨가 책임을 지고 지어서 수확을 가지기로 하였다. 초기 비용은 나중에 추수를 하고 계산을 하기로 하고 농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의 호칭이 불편하여 성 뒤에 주임을 붙이기로 했다. 최주임 이라고 부르고 그에게 생활비를 몰아서 지불하였다. 그동안은 소장님이 식사도 제공하고 간식도 사고 했지만 이제는 담배값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율 운영에 맡겼다.
그렇게 되니 최주임의 힘은 더욱 강하게 되었다. 정주임은 시골로 오기전 정신과 병원에 입원을 하기로 했다. 알콜중독에서 해독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일종의 페널티 같은것이기도 했다. 최주임은 욕심껏 밭에 고구마 순을 심는다고 하여 고구마 순값이 꽤나 들었지만 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꺽지는 않았다. 3개월 후 돌아온 정 주임은 여전히 겉돌았다. 고구마 밭에 풀이 나기 시작했다. 최 주인은 일손이 모자라니 정주임이 도와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듯 했고 나도 정주인을 살살 달래 보았지만 최주임의 지난 소행이 아직도 괘씸하고 최주임도 어색한지 깐죽거리는 말투로 말을 건네니 꼬인 마음이 풀어질리가 없었고 정주임은 자기 일이 아닌듯이 나 몰라라 했다.
나는 그들을 계속 같이 두고 보면 안될것 같았다. 정주임이 이제 겨우 마음을 잡았는데 같이 붙여 놓으면 무슨일이 분명히 날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알콜 중독자는 환경이 중요하다. 그들이 살았던 곳에 술먹기 좋은 환경에 자리 잡으면 둥지를 틀어 술독에 빠지고 만다. 시골 공동체는 자기들이 농사를 해보겠다고 하니 그냥 두고 보는것이 좋을 듯 했다. 정주임을 데리고 제주도로 가는것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역을 돌아 다니는것이 힘이 들었다. 쉬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물론 체력이 약해졌고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해서 움직인 탓도 있지만 노숙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를 노숙인을 취급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교회에서도 나를 같은 사역자로서가 아니고 노숙인과 같은 부류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서 나의 자격지심에서 나온 생각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고구마 추수를 하고 바자회가 끝나면서 공동체 식구들과 여행을 갔던 제주도는 나에게 오래전 건축일을 했던 그 시절을 떠 올리게 했다.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고 들었다. 오래된 수첩에 그들의 전화 번호가 있었지만 전화를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연락도 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 연락한다는것이 내키지 않았다.
작년에 제주도의 바람을 맞고 오니 제주도에서 생활 했던 그때가 그리웠고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돈을 마련하기 어려웠지만 자금만 된다면 인력 사무소를 운영하여 공동체 운영 자금을 마련 하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장님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 하고 자신있다고 하였다. 소장님은 나의 말을 믿어 주고 3천만원을 마련하여 주었다. 제주도에 알던 동생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서귀포에 방을 얻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초인의 힘을 다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음 중심에 알 수 없는 결기를 다시 한번 다지면서 제주행에 대한 나만의 이유를 찾아갔다. 미친짓일지도 모르는 나의 이러한 행보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 드디어 정주임과 함께 제주도에 가기 위해 목포로 출발을 했다. 목포까지 가면서 정주임은 같이 동행하는 내내 내가 한 지난날의 이야기를 헛소리 마냥 들었던지 저녁무렵 목포항 근처에 도착 할 때쯤 진짜 제주도에서 많은 일을 하셨네요 하면서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듯 말했다. 마음 속으로는 이제 제주도에 가면 더 놀랄 일들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지난날을 자랑 하듯이 떠들어 대는 나자신을 느끼고는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 못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를 인정 받으면 어떻고 노숙인으로 생각하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를 드러내고 싶은것은 내가 살아있다는것이라고 위로했다. 새벽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여객선이 출발하는 항구 옆 모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몸은 고단 했지만 새로운 일을 한다는 생각에 약간 긴장이 되었던지 잠이 오지 않았다. 정주임은 정신과에서 주는 수면제를 먹고는 세상 모르게 잤다. 밤늦게 잠을 잔탓인지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더니 정주임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아침 일찍 차를 승선을 하고 다시 여객실로 오는일도 쉽지 않았다. 물살을 가르고 흰 파도가 너울거리는 풍경은 약간의 멀미를 나게 했지만 초여름의 아침 바다는 상쾌 했다.
정주임은 옆에서 강원도에서 군인으로 근무할때 바닷 낚시를 갔던 이야기를 한참 한다. 쉬는 날 무조건 낚시가방을 매고 나가면 마누라가 잔소리를 하고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냐고 하면서 나존 데려가라고 해서 하루는 섬으로 났시를 데려 갔다고 한다. 하루종일 섬에 갇혀서 있더니만 다시는 낚시 이야기를 안하더라고 하면서 무슨 재미로 낚시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낚시대는 엄청 비쌌고 그런 낚시대가 종류별로 있었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 놓는다. 마누라가 살림도 잘했고 김치장사를 해서 돈도 벌었는데 언니를 따라 서울가자고 김치 장사를 때려치우고 서울가서는 바람이 나서 몇대 때렸는데 처형이 와서 감옥 갈래 합의 이혼 할래 해서 이혼 해줘버렸다고 했다.
서울에 같이 있을때 몇번이고 들은 이야기를 처음 이야기 하는 사람처럼 또 한다. 바다 풍경이 있어서 들어 줄만했지만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내려서 마중을 나온 인력 사무소를 하는 동생과 밥을 먹으러 갔다 목수로 일하던 동생인데 내가 하던일을 물려주고 제주도를 떠났는데 그일이 제법 커져서 이제는 제법 밥을 먹고 사는것 같았다. 나에게 신세도 졌고 돌봐줬던 동생이라 극진히 모시며 바닷가 횟집으로 가서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대접을 하니 정주임이 놀라는것 같았다.
그 동생이 나를 세워주느라 제주도에서 내가 동생들에게 했던 미담들을 들려 주니 정말로 그런일을 하던 사람이라는 확인을 한 셈이었다. 나는 제주도에서도 현장 감독을 했었다. 작지만 강한 인상의 나를 쉽게 보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건축주나 건설 회사 사장들이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것을 무시 하지 못했었고 나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력들의 편의를 봐주었고 잘 이끌었다. 제주도 현장에서는 나를 찾는 건축주들이 많았었다.
밥을 먹고 서귀포 오피스텔로 가서 간단한 짐을 풀고 인력회사하는 동생에게 정주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나에게는 목수일도 하였다고 하면서 현장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했지만 막상 일을 하려고 하니 꽁무니를 뺀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고 경험 한것은 철거 하는 일을 좀 했다는것이 탄로가 났다. 잡부로 일을 하는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서 일을 할 곳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 하면서 내가 죽기전에 다시 한번 일 해보고 우리 공동체에 도움을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작은 공사를 맡아서 인력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알겠다고 하고 돌아간 동생은 일주일 후에 전화가 왔다. 형님 제가 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형님 일이라면 모두 나서겠다고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래도 의리가 있는 친구들이다 생각하고 고마워서 울컥했다.
그날 저녁 만난 동생들은 전우를 만난듯했다. 형님이 건강을 잃고 잠적 하셨다고 해서 무척 걱정을 했고 사방으로 연락을 하고 찾아다녔다고 하면서 연락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무척 고마웠다. 다시 한번 일어나서 그들에게 나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음날이 되어 정주임은 인력을 나가는 일이 어려울것 처럼 이야기를 했다. 일을 하면 수급을 받을 수 없게 되기도 하고 전에 다쳤던 곳이 아프다고 하면서 조금 만 더 쉬고 다음에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일을 나갈것이라고 기대는 안했다. 일단 시골 공동체로 부터 분리하는 일이 시급해서였다.
수급을 받는 사람도 100만원 내에서는 돈을 벌 수 있을거라고 알고 있어서 이미 이야기를 했었고 놀고 있으면 딴생각을 하니 소일거리로 하라는 뜻이었다. 노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부풀려서 말을 한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여 과대 망상의 시작이 된다. 알콜 중독자는 거기에다 술을 먹고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 그러니 거짓말이 늘 수 밖에 없다. 알콜 중독의 여부를 가릴때 일상 생활을 유지 할 수 있는지에 따라 알콜 중독인지 애주가인지를 가리기도 한다. 알콜중독은 우리의 뇌속에 정지 기능이 고장난 정신질환자로 구분이 된다. 충동적인 음주 상황을 피하기만 하면 어느정도 참을 수 있기도 하다.
인력일은 시작이 되었다. 그동안 시스템이 많이 바꿔서 인터넷을 써야 하는일이 많아졌고 일당 지급도 인터넷 뱅킹이 기본이 되어 있었다. 전에 내가 일을 할때에는 꼼꼼하게 관리를 하여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가 아니면 어려웠고 인력에 오는 잡부들도 주민등록증이 없어도 일 시키고 돈만 잘 지불해주면 문제가 없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일일이 주민등록을 카피하고 그들의 신원을 파악해야 해서 여간 힘든것이 아니었다. 정주임도 나이가 있어서 가까운데 심부름이나하고 같이 밥먹는 일이나 했지 인력 사무소의 일은 도움이 못되었다.
그래서 서울의 박군이 생각이 나서 제주도에 내려오게 했다. 잔일도 시키고 인터넷으로 처리 해야 하는 일은 할 정도가 된다고 생각을 하고 불러 들인것이다.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 어느정도 되었고 작은 별장을 짓는것이라 그렇게 까다롭지 않게 일이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3달이 지나고 서울 집도 걱정이 되고 시골 공동체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서울로 올라 왔다. 오랫만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 왔다. 반가운 사람들도 만나고 그동안 제주도에서 한일도 이야기 했다. 그런데 한여른의 에어콘 바람이 너무 강하다 못해 나에게는 몹시 춥기 까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감기가 덜컥 걸렸다. 제주도에서는 에어콘 틀 생각도 안하고 지내도 좋은 날씨 였는데 서울의 더위에 사람들이 참지를 못하고 추울정도로 에어콘을 틀어댔다.
급성 폐렴으로 입원을 하게된 며칠동안 같이 올라온 박군이 보이지를 않았다. 아차 하고 스쳐간 생각이 있었다.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통장을 맡기지 않았고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통장에서 600만원을 빼간것이었다. 얼마나 도우려고 애를 썼고 함께 잘해보자고 그렇게 다짐을 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실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아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경찰에 신고를 하여 위치 추적을 했다. 부천의 어느곳인데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일주일을 넘겼다. 열흘이 가까워오니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부천의 어느 골목에서 술을 먹고 쓰러져 있는것을 경찰에서 데려 왔다고 한다. 벌써 돈은 브랜드 옷을 한벌 사입고 나머지는 게임에 이미 다 쓰고 없다고 했다. 공동체에서 준 핸드폰도 잃어버렸다고 했다. 경찰 구치소에 넣겠다고 하는것을 책임지겠다고 사정사정하여 데려왔다.
몸이 다 회복하기도 전에 퇴원을 하여 힘이 들어 제주도를 갈 수가 없었고 제주도의 일은 건미안한 마음을 담은채 덮기로 했다. 축이 다되어가는 시기에 마치기로하고 뒷일은 인력회사를 하는 동생에게 부탁을 하며 마무리를 하였다 . 소장님에게는 투자 금액인 3천만원을 다 돌려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문제에 대한 질책이나 군소리를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어떻게 표현 할 길이 없는 마음이었지만 변명을 하지 않고 마음에 담기로 했다.
박군은 시골 공동체에 합류하여 농사일을 돕고 있었지만 길게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정주임은 다시 서울의 내옆으로 돌아 왔다. 한번 실패를 한 경험도 있고 해서 바짝 신경을 쓰면서 같이 서울역도 가고 교회도 같이 다녔다. 시골 공동체는 되도록 가지 않고 격리된 생활이 계속되었다. 교회에서는 분기별로 해외 선교를 나가기도 하고 해외에 선교지가 있기도 하다. 우리 교회는 아프리카에 선교지가 있다. 양계장을 만들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스스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우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목사님께 어떻게 하면 아프리카에 갈 수 있는지를 물었고 박군이 그곳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군은 교도소에 갈 수도 있었던 절도 혐의를 보증을 서고 안가도록 해준것에 대한 고마움 이었는지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려고 작정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프리카를 가겠다고 하면서 보은의 양계장에 교육을 받으러 간다고 했다. 반신반의 하면서도 아프리카 선교를 가는 준비를 하였다.
양계교육을 받고 선교사로 가는 교육도 받았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사람을 변하게 하였다. 자신을 확정짓는 선교사라는 이름이 변화요인으로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같이 선교 나갈 선교사님들과의 교제가 외형적인 태도와 말씨를 변화시켰다. 옛말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무슨말인지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로의 파송은 그렇게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1년을 기약하며 파송식을 통해 아프리카로 출발하였다. 조마조마 하면서 이루어진 아프리카 프로젝트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박군의 결단도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더 기적 같은 일들을 기대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는 사이 시골의 공동체는 예상했던 일이지만 농사를 짓는 일에 고전을 하고 풀을 다 메지 못해 고구마 보다 풀이 많은 고구마 밭이 되었지만 그들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구걸을 하거나 노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낸 3년의 세월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수급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선교사로 나가기도 하고 자립해서 직장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그일로 공동체에서 아주 이탈한 사람이 있었다. 원래 정신과 질환이 있었던 장주임은 그사이 시골 공동체와 서울역을 4,5번을 오고 갔다고 한다.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않으면 서울역에 나가 노숙을 하다가 어려우면 무조건 택시를 타고 와서 택시비를 내놓으라는 사건이 몇번이 있었다고 한다. 장주임은 20대 후반 부터 정신 질환으로 수용 시설에 있다가 도망 나온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장주임은 우리 공동체에서 나가 서울역에 돌아다니다 어떤 시설에 수용되었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하기도 하고 팔이 아프다고 하여 진료를 받으니 목디스크가 있다고 하여 수술을 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 었다. 보호자가 없고 의사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생긴 의료사고가 아니가 의심해 보기도 한다. 수급을 받은 공동체 식구들은 의료급여도 받는다. 어느과 진료를 받는다고 해도 진료비와 약값이 무료이다 보니 병원을 자주 간다. 물론 근로능력이 없을 정도가 되면 몸이 성하지는 않다. 그러나 정형외과에가서 진통제 받고 신경과 가서 근육 이완제 받고 내과에가서 진통제 받고 또 다른 병원을 전전 하면서 받은 약들이 잘못 복용이 될 수 있을거이라는 우려가 있다. 최근에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야만 진료를 해주는 것도 필요한 조치이지만 신중한 약 처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혜택을 받는 사람도 많다 나는 요즈음 들어 더욱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페질환으로 70% 폐가 망가져있고 파킨슨씨병으로 몸이 굳어가서 장기 요양보험 판정을 받으려고 신청을 하였다. 의료보험 공단에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 나는 요즘 더욱 몸을 움직일 수 없고 걷기가 어려워서 전동차를 신청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였다. 동사무소에 겨우 가서 신청을 하고 정 주임의 부축을 받고 돌아오는데 힘이들어 몇번을 쉬어오는지 모른다. 요즘 들어서는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고 정신력으로 버텨본다고 해도 역부족인 나의 몸상태에 마음이 무너진다. 의료보험에서 상태를 보러온 직원들이 2명이 왔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마지막에 500원자리 동전을 보여주더니 뭐냐고 물어봤다. 500원이라고 답을 했다. 그들은 그렇게 돌아갔고 나는 장기요양보험에 등록하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그길로 장주임을 대동하고 택시를 타고 의료보헌의 노인 장기요양보험 담당자에게 달려 갔다. 나는 다른 사람 도움이 없으면 걸을 수도 없고 연하곤란으로 삼키지도 못한다. 폐가 망가져서 찬바람만 호흡해도 폐결핵이 걸리는 사람인데 가만히 앉아서 죽으라는 것이냐고 소리를 지르고 왔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와서 몸져 누웠다. 정 주임이 차를 태워 왔는데도 바로 자리에 누워 분함을 삭이지 못했다.
정주임이 자기집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생각하니 밥도 같이 먹지 못하고 보냈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정 주임은 나에게 심부름도 해주고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면 담배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하는데 그럴 생각도 못하고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조금 섭섭한 눈치이다. 나도 밥을 먹어야 하니 죽이랑 컵라면, 햇반등을 사오면 돈을 주겠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공동체에 있을때 오랫동안 담배도 사주고 용동도 줬는데 내가 이렇게 아픈데 도움을 준것에 댓가를 받을 생각만 하다니 하고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고마운것만 생각하자라고 마음을 돌렸다.
우여곡절 끝에 1년이 지나 장기요양 4급 판정을 받았다. 의료보험 공단까지 가서 소란을 피워서인지 사회복지사가 말을 잘해줘서인지는 모르지만 요양보호사가 3시간씩 방문을 한다. 시골의 공동체는 아예 갈 수가 없다. 전화로만 잘하고 있으라고 할 정도이다. 그곳을 최주임이 지키면서 농사일은 잘하지는 못하지만 소장님과 이런저런 행사도 하고 잘 지내는것 같았다.
정주임은 나에게 오는 요양보호사가 부러운 모양이었다. 자기도 몸이 아파 죽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해야 혜택을 받는지 물어 온다, 걸음도 잘 못걷는다고 말한다. 간혹 우리집을 온다고 하면 창문을 내다보면 걸음걸이가 정상인데 내 앞에서는 절룩거리며 걷는다. 건강할 때가 좋은거라고 하면서 장주임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잘못 판정 받으면 보호자가 없으니 요양시설에 들어가 장주임처럼 된다고 엄포를 놔주었다.
정주임은 정이 많은 사람이라 주소를 알면 장주임을 한번 찾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나의 몸은 점점 더 굳어가기 시작했다. 파킨슨씨병은 밤에 잠을 들지 못하도록 쥐가 나고 머리가 꽉 조이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불쾌하기도 하지만 말을 하는데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증상은 나를 더 힘들게 한다 .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 어린 시절 무시 당하고 불우했던 기억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고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부질 없었던 것이지만 그때의 그것은 나를 살게 한 힘이었다. 때로는 잊고 싶은 기억들도 나로 살아 내기 위한 몸 부림 이었다. 이렇게 불행 했던 과거와 용서를 받고자 하는 많은 일들 조차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건 죽음을 앞둔 사람의 자비의 마음일까. 어머니 아버지 과거의 깡패 소굴에서 나에게 잔인 하게 굴던 패거리들… 이렇게 하나 둘씩 헤아리면서 잠 이 오지 않는 밤을 보낸다. 그렇게 보낸 날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새벽 바람을 헤치고 나간 기도시간에 내 머리를 치고 들어온 생각이 있었디. 그동안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는것이 용서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내를 떠 올렸다. 지적 장애가 있었던 아내를 얼마나 이해 했을까. 나의 기준을 적용하여 항상 불만을 가지고 대했던 아내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의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고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을까.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이 너무나 길었다. 아침이 되니 오래된 수첩 속에서 아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나와는 연락이 끊겼지만 아들하고는 연락이 되었을것 같았다.
아들의 전화번호는 그대로 였다. 나 또한 전화번호가 그대로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를 그리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서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처럼 말이다. 아들과 나는 몇년만인지도 모를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냥 덤덤하게 만났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고기를 사주고 싶어 고기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그냥 간단하게 먹자고 김밥집으로 나를 끌었다. 순간 나와 오래 같이 있는것이 불편 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의 자존심이 중요해서 내주변을 정리 하고 매몰차게 떠났던 나의 과거가 몹시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당시의 나 자신이 선택 할 수 있었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길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고 또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어쩔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아들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선생님이 소개한 회사에 취직을 해서 지금까지 다닌다고 한다. 화장실에 사용하는 수전 부품을 만드는 공장인데 직급도 높아졌고 회사 분위기도 좋다고 했다. 헤어질 당시 남겨준 전세집과 당장 쓸돈이 든 통장을 잘 관리하여 큰 어려움은 없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름 잘 지내는것 같았다. 최근에 맹장 수술을 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회복을 했으며 다른 건강 문제는 없는것 같았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돌보지 못했는데도 삐뚤어지지않고 자라준 아들이 고마웠다.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 주려고 하는건지 교회 청년회에 속해 잘 지내고 있고 목사님 가정과도 친밀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맹장 수술을 했을때 청년부 친구들이 와서 잘 챙겨주고 청년부 밴드도 결성해서 활동을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 건강을 오히려 염려해 주었다.
아내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헤어졌다는것이 전부였다. 군대에 입대 할때 연락을 했는데 엄마의 반응이 무덤덤 해서 그 뒤로 연락을 안하게 되더라고 했다. 의정부 어디에 산다는 것과 국가에서 제공하는 집에서 산다는것을 보니 기초생활수급자로 사는 모양이었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오면서 이제 엄마를 왜 찾는지 궁금해 할것 도 같은데 아들은 묻지 않았다. 혹시 몰라 아들과 사진 한장을 찍었다. 아내를 만나면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내를 찾으러 주소를 가지고 파주로 갔다. 골목길 어느 빌라를 찾아 주소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더니 전화를 걸어 나를 밝히고 문앞이라고 하니 한참 있다가 겨우 문을 열었다. 지방에 사는 친척집에서 일을 거들어 주고 어젯밤 늦게 왔는데 피곤해서 못 일어났다고 한다. 아내는 단칸 방에서 생각했던대로 기초 생활 수급자로 살고 있었다. 방 한칸에 살림 살이도 변변치 않았다. 집에 어울리지 않은 큰 김치 냉장고가 눈에 들어 왔다. 그래도 혼자서 살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를 않았다. 그리고 왜 찾아왔는지를 물었다. 나는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아내는 나에 대한 원망이 있는것 같았다. 방안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의 건강이 나빠졌고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당신에게 무슨일이 있었든지 화내고 구타했던 것은 내가 잘못한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짜고짜 자기는 바람 피우지 않았다고했다. 내가 사우디에 있는 동안 장모님이 많이 아픈적이 있었다. 그때 연락할 곳도 없어 평소에 알던 내 친구에게 급하게 연락을 했고 장모님이 병원 갈때 도와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고마워 집에 오면 장모가 반찬도 해주고 집안 일도 도와주었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많은 오해와 잘못된 판단이 낳은 결과는 돌이킬 수 없었다. 머리가 조여오고 뻐끈했다. 파킨슨씨 병으로 인한 증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또 다른것이었다. 말없이 한동안 앉아있다가 만나면 주려고 준비한 1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냈다. 거절 하지도 받지도 않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아들하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보여준다고 사진을 찍으면 어떠냐고 하니 어색해 하면서도 머리를 다듬고 바로 앉는다. 그러면서 지갑을 뒤지더니 반명함판 사진을 하나 건넨다. 웬지는 모르겠지만 코끝이 찡했다. 아들을 한번 만나라고 하면서 반명함판 사진을 핸드폰에 찍어 저장을 하고 반명함판 사진은 바닥에 두고 나왔다. 아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것 같았다.
돌아 오는 길은 텅빈 마음뿐이었다. 저질렀던 잘못들이 없어지질 않을것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걸 아시고 계셨을텐데 나를 용서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을까?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것일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걸 믿기만 하면 나의 죄를 다 용서 하신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나를 용서 할 수 없었다. 내가 했던 모든일을 되돌아 보니 구제 불능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국민학교때 남의 물건을 훔친일, 수용소에 잡혀가 모여 있을때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옆 사람에게 물었는데 앞에 교관이 방금 떠든사람 누구냐고 소리칠때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는데 옆에 사람을 불러 세우더니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가지고 있던 지휘봉으로 마구 때렸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또 깡패짓을 할때 떼로 몰려가서 괴롭혔던 사람들, 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딩당하지 못한 많은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가면서 죄인 중에 죄인 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건강을 잃은 다음에야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것이 아쉬웠다. 건강 할때 깨닫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뭐든지 해낼수 있다는 오만함과 불처럼 확 타오르는 독한 성격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으신 마음으로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잘난척 하며 살았을 나인데 더 늦지 않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늘나라 가게되는 은혜가 감사하여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실핏줄이 열리는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고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마음에 응어리진 모든것들이 녹아 흘러 내리는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으신 이유가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하셨구나 라고 생각이 들면서 지금까지 의심 스러운 성경의 내용이 모두 믿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죄인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은 기적과 같았다.
몸은 비록 아프지만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사는 삶을 살아가는것이다. 한없이 후회해도 지워지지 않은 나의 과거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흰눈처럼 되었다는 맏기지 않은 말을 믿기로 했다. 흰눈처럼 된다는데 믿지 못할것도 없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피 흘림은 나를 자유케 하였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에게 다가오는 말씀의 능력은 나를 새롭게 하였고 다 이해가 되었다. 다 믿어졌다. 머리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들이 마음에 스며들어와 하나님의 존재가 신기하게 믿어졌다.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일은 내 힘이 닿는대로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우리 공동체를 위해 일을 하는것이었다. 그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역 노숙인 센타에 인문학교육을 받았던 옛날 일을 떠올려 찾아간 곳은 다른 시설로 변하였다. 노숙인들에게 교육을 하는데 심리치료 위주의 교육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했다. 시골 공동체의 소장님에게 미술치료를 부탁했다.
미술치료는 노숙인들처럼 소통이 잘안되고 표현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좋은 활동같았다. 교육센타를 담당하는 팀장님이 미술치료를 하는 소장님에게 노숙인 학교 교장 선생님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 소장님은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나는 서울역 교육센타를 맡아서 활동을 하면서 시골의 공동체의 이름을 지었다. 푸른 들에서 함께 어우러져 가족처럼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푸른들 가족 공동체라고 이름 지었다. 그건 소장님의 미술치료 연구소 이름인 푸른들가족생활연구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푸른들 가족공동체에 남은 사람은 몇 안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남은 사람은 노숙에서 벗어나 일상 생활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성공 했다고 본다. 나는 그렇게 위안을 삼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가족을 만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것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 과거의 상처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회복 하여 다시 시작 해야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남은 기능을 찾아내어 살려내고 유지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얼마전 병원에 정기 검진을 받으로 갔다. 파킨슨씨 병으로 인한 치매가 진행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식사 할때 음식을 삼키는 일을 잘 신경 쓰라고 하셨다. 몸이 굳어지는 속도가 빠르게 진행이 되어 음식이 폐로 들어가면 폐렴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오늘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서울역 방문을 했다. 서울역 광장은 시끄럽고 여기저기 노숙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속에 품은 깊은 슬픔은 나만 느끼는 것일까 내안에 그들의 아픔이 스며든다.
